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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허탕에 허탕

25. 1. 9. (목)

by 영글생


어느 날부터 애플펜슬이 사라졌다. 케이스로 고정하여 보관하는 아내와 달리, 나는 아이패드 본체에 애플펜슬을 자력(磁力)으로 고정하여 사용했다. 지난 2년 간 애플펜슬이 종종 본체와 떨어져서 보이지 않더라도 가방이나 책상에서 쉽게 찾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일주일 넘게 못 찾았다. 아내와 함께 온 집안을 뒤집었다. 장난감 더미부터 침대, 소파 속까지 손으로 쓸어가며 찾았건만 허탕이다. 한 20만 원가량 했던 것 같은데. 속이 쓰리다 못해 썩는다.


가지고 외출하질 않았으니 집에 있을 것만 같은데. 아내는 '첫째가 가지고 놀다가 버려진 휴지곽 같은 데에 집어넣은 걸 모르고 버린 게 아닐까'와 같은 그럴듯한 이야기로 내 속을 괴롭힌다. 첫째에게 물어도 모른단다. 익숙한 공간에서 상실이기 때문일까, 관리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정품이 아닌 가품을 찾아야 하나. 툭 튀어나와 주길 바라는 마음을 놓지 못하다가 결국 당근마켓에서 구매를 결정하고 판매자를 만났다. 거래하며 판매 사유를 슬쩍 물어보니 본인도 애플펜슬만을 잃어버려서 중고로 샀다가 다시 찾은 김에 되판다고 하였다. 분실의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만은 아니구나. 위안이 되면서도 웃겨서 쓴웃음이 났다.


열흘이나 지났을까. 화장실에 있는데 아내가 찢어지는 소리로 "유나야"를 외친다. 무슨 일인가 싶어 숨을 죽이는데 웃음기 머금은 높은 톤으로 재차 묻는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부지불식간 힘껏 소리쳤다. "여보, 애플펜슬 찾았다는 말은 말은 아니지!" 첫째에게 이걸 어디서 가져왔냐고 물으니 안방 창틀로 이끌었단다. 블라인드 내린 하얀 창틀에 하얀 애플펜슬을 올려두면 그걸 어찌 찾나. 이걸로 첫째를 의심한 심증은 확증이 된다. 그리고 며칠 뒤 아내의 이어폰이 사라졌다. 범인은 같은 범행을 저지르는 법. 유나를 살살 꼬셔서 이어폰의 행방을 물었더니 식탁 아래 와이파이 단자함에서 가지고 나온다. 아니 그걸 거기에 숨기면 어떻게 찾냐고!


하루는 집에만 있기에 답답해서 산책을 나왔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두 녀석과 동네 한 번 나오자니 해가 저문다. 첫째가 포도 타령을 해서 근처 이마트에 다녀오려는데 걸어가겠단다. 강아지를 산책시켜도 이럴까. 나무도 만져보고, 개미도 관찰하고 느릿느릿 가다 보니 1Km 거리를 가는 데 50분이 걸린다. 찬 바람에 볼이 빨개져 다리가 풀린 아이를 안고 도착한 이마트는 문이 닫혔다. 아 오늘이 네 번째 일요일이구나. 한참의 산책이 허탕이 된 것 같아서 힘이 쭉 빠진다.


그 순간 유튜브에서 본 김정운 박사의 이야기가 스쳤다. 남해에 마련한 도서관에 바닷물이 들이쳐서 구하기 힘든 책들이 몽땅 젖었단다. 건조기로 말리고 사진으로 찍어두었건만 구하지 못한 책이 너무 많아서 속이 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어령 선생님이 말하시길 "아, 김 박사 잘 된 거야" "아니 선생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엄청난 책들이 날아갔는데요." "이거 봐 김 박사, 당신이 바닷가에 가서 폼나게 도서관 짓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그럼 그게 뭐야. 너한테는 아무 이야기도 없어. 태풍 치고, 책 말리고, 울고. 이래야 '삶'인 거야. 삶은 이야기야."


잔잔하고 순탄한 사건의 연속이 무슨 이야기가 되겠는가. 소설만 보더라도 갈등이 일어나고, 긴장이 고조되고 그래야 재미가 있지. 우리 삶 또한 이야기가 될 때 빛이 난다면 허탕은 허탕대로 의미가 있겠다. 이 말을 들은 아내는 헛웃음만 짓는다. 돌아오는 길엔 포도를 사러 동네 슈퍼 쪽으로 향했다. 그새 둘째가 깨어 우는 바람에 나는 애들을 데리고 집으로, 아내는 포도를 사러 갔다. 효율만 보면 나 혼자 슬쩍 장을 봤다면 금방일진대, 그놈의 포도를 사러 온 가족이 겨울 길 위에서 씨름하며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기록으로 그날의 우리 이야기에 재미가 앉길. 곶감 위에 내린 하얀 시설(柹雪)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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