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우공이산도 함께하니 좀 낫네
24. 09. 30. (월)
올해 국군의 날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보통은 공휴일에 직장이 쉰다. 어린이집도 쉰다. 집안일을 할 수 있는 여유도 귀하다는 걸 육아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다음 주에는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장기간 집을 비우기 전에 해치울 일들을 손꼽아 보니 만만찮다. 첫째 유나가 어린이집을 가니 오늘은 꼭 숙제를 해버리자고 칼을 빼었다. 그런데 둘째 이나 피부가 며칠 새 점점 나빠진다. 병원부터 가야겠다.
나는 듯 유나를 등원시키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진료 시작은 9시. 9시 2분에 접수를 했는데 대기 번호가 19번이다. 주말이 지나서인지 유독 환아가 많다. 기왕 밀린 거 커피나 한 잔 하자고 나간다. 빽다방 아메리카노는 양이 넉넉했다. 카카오톡으로 안내되는 대기 순번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동안 이나는 잔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말이 많아진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소재로 수다를 나누니 한 시간여가 지루하지 않다. 여태 소아과에 혼자 애를 데려오면 늘 대기실에서 순번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토피 판정을 받았다. 잦은 보습이 필요하다는 진단에 제로이드 크림을 처방받았다. 점심을 먹은 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다. 나는 실내 세차와 차량 정비, 아내는 고구마 쪄서 냉동시키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실내 세차를 한 지가 까마득하다. 유나를 차에 태울 때마다 갑갑함을 과자로 달래다 보니 카시트도 가루 천지다. 2주 전에 아버지가 주신 고구마 한 상자도 위험하다. 베란다에 덮어 뒀더니 싹이 나는 조짐이 보인다. 카트와 유모차를 이용해서 차량 내부를 싹 비운다. 수레 두 대로 지하 주차장을 두 번 왕복했다. 아내는 드라마를 보면서 고구마를 손질한다. 상한 부분이 꽤 된다. 카시트 두 대의 커버를 벗기니 1시간이 넘게 지났다. 내친김에 유모차도 빨아보자. 손질한 고구마는 이제 절반이다.
두 친구가 나를 보겠다고 우리 동네 세차장에서 세차를 한 적이 있다. 첫째가 너무 어렸던지라 나는 못 나갔지만 이번에 처음 그곳에 가 보았다. 에어건으로 불어 가며 온갖 먼지를 마셨다. 걸레질을 하다 보니 군복무 시절 생각도 난다. 잘들 살고 있으려나. 부랴부랴 엔진오일을 갈러 공업사에 갔는데 만석이다. 정비까지는 어렵겠네. 유나를 하원시키며 함께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눌어붙은 찜솥 바닥과 싸우는 중이다. 슬쩍 보니 쪄야 할 고구마가 아직도 절반이다.
매일 하는 집안일을 이제야 시작한다. 장난감 정리하고, 카시트 커버와 함께 빨래도 연달아 돌린다. 설거지하면서 젖병도 씻고 쓰레기도 버린다. 기력이 달린다. “여보 유나는 저녁 먹고 씻길까?” 찜솥에서 나온 열로 집안이 후끈하다. 아이 이마도 땀범벅이다. 냉동 삼겹살을 레인지에 해동시키는 동안 해치우자. 목욕 후 물기를 갓 닦은 아이를 아내에게 넘기고 고기를 굽는다. 로션을 발라주고 아내도 상차림에 합류한다. 고기 몇 점과 맥주 한 잔에 세상이 다채로워진다. 바닷물 같은 가사 노동을 오늘도 한 컵 퍼 냈다고 서로의 노고를 치하한다. “복직을 해도 집안일은 같을 텐데” “체력을 길러야지 뭐” 걱정까지 대출하진 말자. 은행 대출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니.
결혼 전 육아 부담을 미리 걱정하는 아내에게 내가 혼자 육아휴직 하겠다고 큰소리를 친 적이 있다. 초임지에서 자취를 하며 요리엔 자신이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어찌어찌 육아는 하더라도 살림까지는 어려웠으리. 아내 혼자 육아 휴직을 하는 기간에는 지금보다 통장이 여유로웠지만 마음은 척박했다. 육아의 완성은 독립이라는데 이 또한 언젠가는 끝나겠지. 아마 두 녀석이 조금 더 자라면 지금보다 몸은 편해지리라. 산을 옮겼다는 우공(愚公)의 마음으로 또 하루를 보낸다. 그래도 둘이 함께하니 좀 낫다. 백지장도 그렇다는데 하물며 산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