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지나 중년 맞이하기
대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성사되는 만남인데도 어떻게 하면 안 나갈지 궁리를 했다. 작년에도 불참을 했으니 이번에도 빠지면 영구제명되어 단톡방에서 빠져야 될지도 모르겠다. 근래 한 친구가 육아에서 벗어나 사립 고등학교에 일자리를 구했다. 둘째가 5살이던가, 학교 생활을 8년 정도 쉬었으니 교사 본업 외에 듣기 평가파일 만들기나 생활기록부 작성하는 일 등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전공 탓에 나를 제외한 5명 모두 누군가를 가르치는 업을 삼고 있었다. 다들 한 마디씩 위로와 조언을 건네는데, 나는 무슨 답변을 적어도 어색해 결국 침묵을 유지했다. 그 무리들과 얼굴을 마주해도 될지 망설여져 금요일이라는 날짜와 먼 장소를 탓하며 말을 아꼈다. 몇 번씩 나오라고 하는 절친과 아이 하원을 할 테니 바람 쐬라는 남편의 밀어줌 덕분에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소개팅을 나가는 것도 아닌데 묘한 설렘으로 옷장에서 잠자고 있던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TPO에는 맞는 옷차림 같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과 엄마라는 위치에 괴리감을 느꼈다. 결국 검은 정장 바지에 파란 스웨터로 바꿔 입었다. 대신 무엇이든 다 들어가 항상 들고 다니는 빨간 헝겊 가방 말고 작은 핸드백을 맸다. 화장도 빼놓을 수 없지. 남아 있는 화장품이 몇 개 없었지만, 눈부터 입술까지, 칠해본다.
장소는 종로. 산 위에 위치한 대학교 앞은 놀만한 곳이 못되어 버스를 타고 종종 가던 곳이다. 당시에는 한 시간 정도는 멀다 느끼지도 못하고 서울 안이면 마음껏 헤집고 다녔는데 지금은 도보로 걷는 거리가 마음 편한 생활권이 되었다. 몇 년 만에 오는 곳인데도 익숙한 장소에 도착하자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 호기심이 넘치고 매일 즐길거리 찾아다니던 대학생으로 돌아갔다. 풋내가 물씬한 짝사랑에 속절없이 흐르던 눈물도 생생했다.
늦은 점심으로 만남을 시작했다. 모두들 그대로였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서로에게 피부가 곱다는 둥, 아직도 검은 머리라며, 변하지 않은 젊음을 칭찬했다. 주변 젊은이들이 목청 큰 아줌마들의 소란에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고 있어도 진심으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단톡방에서는 차마 풀지 못한 개인사가 끊임없이 나왔다.
밥 먹는 자리는 커피로, 술로 이어졌다. 막걸리에 무한으로 리필해 먹던 홍합탕이 생각났지만 저녁도 함께 할 수 있는 이자카야로 옮겼다. 주제도 건강으로 바뀌었다. 부모님 연령대에나 일어났던 암이니, 물체가 두 개로 보이는 복시 증상을 우리보다 어린 동생들이 겪었단다. 10년 넘게 딩크 생활을 즐기던 내 친구도 최근 유방암에 걸렸다 항암 치료를 마치고 회복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직 임자를 찾지 못한 한 명은 가임 나이가 아슬해지자 난소를 얼려야 될지 산부인과에 다녀왔다고 한다.
밤 10시가 되었다. 한창 거리를 배회했을 우리들의 만남은 내일을 위해 이른 종례를 했다. 한 해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한 마디씩 나누는데, 거창한 목표보다는 건강하자는 게 공통된 내용이었다.
다들 사는 곳이 달라져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 시간에 버스를 못 탈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가 잠들었다는 남편의 문자를 보며 종종 걸음을 뗐다. 가로등과 둥근달이 길을 비춰주는데도 까만 밤하늘이 낯설었다. 그제야 마냥 에너지 넘칠 것 같았던 청춘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서글픈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는 것, 그들을 지키기 위해 하루를 살아가는 엄마가 되었다는 것에 설레였다. 나의 반쪽과 함께 가꿔온 가족의 품속에서 멋스러운 중년을 맞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