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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고나 Oct 29. 2023

좋아하는 일을 했더니 건강을 잃었다

어느 폐암환자의 시끄러운 독백


(2017년 7월. 그날은 내가 빵집에서 근무한 지 겨우 1년 하고도 2달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폐엑스레이에 희끗희끗한 것이 보인다던 의사 선생님.

여기서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며 나에게 큰 병원을 가라는 것이다.


'그래, 보건소에서는 그럴 수 있어. 종합병원을 가보자.'






종합 병원에서도 모르는 병


부모님께 나의 상황을 알려드려야 될지 고민에 빠졌다. 20년 넘게 살면서 말썽만 부렸던 나인데 건강으로 또 걱정을 끼쳐드리는 것은 아닐까 고민이 되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만약 내가 부모라면 어떨까 생각해 보니 답은 정해져 있었다.


부모님께 상황 설명을 한 뒤 동네 종합병원을 가기로 했다. CT 촬영과 피검사를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뭔가 보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그게 뭔지 확인할 수 없으니 더 큰 병원을 가라.’는 것이다. 동네에서 나름 큰 종합병원이지만, 역시 지방 병원의 한계란… 답답함과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더 큰 병원에 제출할 CT촬영 영상 CD와 소견서, 그리고 각종 서류를 발급받아왔다.


부모님께 이 사실을 전해드리니 예상대로 걱정하셨다. 그리곤 곧바로 수소문을 하셨고, 친척의 추천을 받아 수도권에서 큰 병원이라고 하는 일산 병원으로 갔다(나중에 알고 보니 백병원과는 다른 곳이었다).





무균실에 격리되는 경험



병원에서는 ct 촬영 사진을 바탕으로 나를 1인 무균실에 입원시켰다. 어리둥절함도 잠시 기분이 몹시 가라앉았다. 무균실 입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결핵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병이라고 알려져 있는 ‘결핵’이 걸릴 리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지 어쩌겠어.


태어나서 무균실에 들어갈 일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처음엔 내가 병원균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1인실에다가 깔끔하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니 세상 좋았다. 특실에 있는 느낌이랄까? 잠깐이지만 불안한 마음을 잊을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조직검사를 했다


입원한 지 3일 내내 나오지도 않는 가래를 뱉어댔다. 하지만 아무리 가래를 뱉어도 결핵균은 발견되지 않았다. 3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조직검사를 시작했다.



조직검사는 객담검사로 진단이 나오지 않고, 내시경으로도 확인되지 않는 곳에 세포를 채취하기 어려울 때 직접 미세한 바늘을 삽입하여 조직을 채취하는 검사이다.
조직을 채취할 부위를 마취한 다음 생검침이라고 하는 바늘을 꽂는다.


조직검사를 위해 옆으로 돌아누웠다. 등을 통해 세포를 채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바늘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터라 이번에도 그렇게 아프지 않을 거라며 마취 안 해도 된다고 말하려 했다. 조직검사용 굵은 바늘을 보는 순간. ‘아 그건 좀…’ 차라리 마취주사를 맞는 게 덜 아플 것 같았다.


나는 내 등을 덮은 병원 가운을 올렸다. 맨살에 실내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곧이어 차가운 알코올솜이 등을 닦는 것이 느껴졌다. 마취침도 굵었던 터라 평소에 피검사를 할 때 느꼈던 아픔보다 열 배는 더 아프게 느껴졌다. 독감 예방주사는 아픈 것도 아니었다. 마취약이 들어가고 나니 근육이 긴장한 듯 뻐근하게 느껴졌다.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취약을 맞는다고 느낌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내가 암에 걸린 것이라면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만약 암이라면 수술비용이 많이 나올 테니 그냥 치료받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나는 매우 현실에 충실하게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매일 일이 끝나면 놀기 바빴다.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있었고 매달 평균 200만 원씩 월급이 나왔으며 힘들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 내 모습은 ‘밝음’ 그 자체였다.


조직검사의 결과, 암이다. 지름 2.5cm의 암이다. 아프지 않았지만 아픈 게 맞았다. 그 결과에 충격을 받은 건 엄마였다. 오히려 나는 실감하지 못한 편. 왜냐하면 나는 비흡연자였기 때문이다. 아프지 않았기에 초기일지도 모른다며, 한국은 의술이 좋으니 다 죽는 건 아닐 거라는 태평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망 보험금 얼마지?


만약 보험이 되지 않는다면 치료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항암치료는 비싸다고 생각했기에 더 이상 부모님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망 보험금 정도는 나오길 바라며 남은 인생은 즐기다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암환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머리는 다 민 상태로 몸은 빼빼 말라 피골이 상접한 모습. 그러면서 그런 모습으로 가고 싶진 않다는 생각도 했다.


잠시 뒤 의사 선생님이 오셨다. 의사 선생님은 여기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말과 함께 대학병원을 가야 수술할 수 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나가고 간 자리는 잠깐의 숨 막히는 정적이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엄마였다. 엄마는 가장 빨리 진료를 보면서도 유명한 선생님이 있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서울의 큰 대학병원을 선택하셨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수술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할까?’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만약 그 말을 꺼냈을 때의 엄마 마음이 상상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날게 분명했다. 보험금으로 작게나마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그건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는 일이었다. 스물여섯, 나는 참 어렸고 철이 없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몰랐으니…




본능을 거스르는 일, 아니 오히려 더 살고 싶었던 발악일지도.


실제로 나는 삶을 몇 번이나 포기하려 했던 사람이기에 머릿속으로 온갖 죽는 방법에 대해서 상상하곤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겁이 나서 할 수 없었다. ‘병으로 죽는 건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라고 철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에게 자살은 어떤 죽음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암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인간에게는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서 자살 행위는 본능을 거스르는 일에 가깝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서 소견서와 영상자료를 제출한 후 긴 시간을 기다렸다.

길고 긴 기다림 끝.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X-ray, 흉부 CT, 각종 피검사를 하고 수술 날짜가 잡혔다. 가장 빨리 수술을 할 수 있는 날, 그날은 암이 발견되고 한 달이 지났을 시점이었다. 수술은 3시간 정도 진행될 예정. 3시간의 시간이 짧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만 감았다 뜨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3시간 자고 일어나면 끝난다는데 다들 너무 심각한 것 아닌가?’라며 애써 긴장된 마음을 추슬렀다. 수술이 잘 될지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의 가장 유명한 병원 중 하나이니 어찌 되겠지.



수술 준비를 위해 입원 수속을 했다. 사실 그때까지도 그냥 가볍게 수술만 하면 끝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흉부외과 선생님은 암세포만 제거하면 항암치료 없이 끝날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수술 전까지 나는 휴가 온 사람처럼 잘 지냈다. 병원 밥은 맛있었고 핸드폰을 볼 시간은 많았으며 게으른 나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수술이 잘 된다면


수술 전날 밤,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수술이 잘못된다면 어떻게 될까?‘


죽게 되면 더 못 놀았던 것이, 더 열심히 원하는 것을 하지 않았던 것이 조금 아쉬웠다. 누가 시켜서 하는 삶이 아닌, 내가 진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예쁜 옷도 입어보고 싶고 아직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다. 제대로 놀아본 적도 없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니 욕심이 생겼다. 그동안의 삶이 후회로 가득 찼다. 다음날 있을 수술이 걱정되었다. 나는 애써 별일 없을 거라며, 잘 되길 하는 바람과 함께 오지도 않는 잠을 자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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