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타, 오늘 만나러 갑니다.

by 테라

우리나라에 산타가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일까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1920년대 어린이 잡지를 통해서라고 합니다. 100여 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네요.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을 보람으로 알고 살다 보니,

이맘때가 되면 자연스레 '산타 할아버지'에게 관심이 쏠립니다.


갖고 싶은 선물을 한 달 훨씬 전부터 소망하며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시대를 지나도 아이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곤 합니다.


사실 저는 산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아니 없다는 표현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산타가 본디 부모의 역할에서 이루어지는 거라면 단연코, 내게는 어린 시절에 산타가 단 한 번도 찾아와 주지 않았던 것이 맞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을 지배하던 종교적 색채가 불교였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 분주한 삶을 살아가는 세련된 문화를 누리지 못하셨던 부모님 생각의 범주에는 '산타'라는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이맘때가 되면 교회에서 열리는 이벤트성 행사에, 선물을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잠시 일회성 신자가 되어보는 경험을 통해 크리스마스라는 날이 선물을 받는 날이라는 잠시의 기쁨에 빠지기도 했더랬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산타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단지 너무도 바빠서 내 순번까지는 올해도 오지 못했구나라고 자위하는 시간과 내년을 기대하기를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치만, 이 세상에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까지도 크리스마스에 끝내 산타는 나를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게는 산타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계셨습니다.


기분 좋게 한잔을 걸치고 귀가하실 때 한 손에 들려있던 선베이 과자가 어쩌면 내게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력 속 숫자는 분명 12월 25일이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선베이 과자를 사들고 오는 날들이 내게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반가왔고 입안에서 오도독 거리는 과자 맛은 최고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선베이 과자를 통해 느끼고 싶었는가 봅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더 이상 선베이 과자를 사주실 아버지는 내 옆에 안 계시지만

이제는 귀하디 귀해진 선베이 과자를 정말 우연이라도 마주치는 날이면 한참이나 멈춰 서서 그 맛을 상상해 봅니다. 그 뒤로 기분 좋게 취해 이름을 부르며 잠자리에 든 남매들을 깨우는 분주한 손길도 그려집니다.


내게 산타가 있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네!'라고 답하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산타의 방문일이었지만,

나의 산타는 그렇게 내 어린 시절에 불시에 찾아와 오도독 달콤함을 안겨주었으니까요.


꽃피는 계절이 되면 꽃놀이 가자, 맛난 것을 함께하자 했던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할 그것이었음을 알면서도 위안을 가장한 거짓이었을까요?


긴 긴 이별을 나눈 지 이제 1년이 가까워지는 오늘.

모두가 조금은 들떠있는 오늘.


산타가 와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오늘은 만나려 가렵니다.

나의 산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