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주, 화요일
민준이가 아빠, 다은이가 엄마 역할을 맡아 알콩달콩 소꿉놀이가 시작됩니다.
이럴 때 선생님에게 필요한 건 '귀는 열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는' 센스입니다.
너무 대놓고 쳐다보는 '직관모드'가 될라치면 아이들이 선생님의 시선을 의식해, 하려던 말들이 쏙~ 들어가는 경우 있기 때문이지요.
날것 그대로의 아이들 세계를 엿보기 위해선, 그저 무관심한 척 다른 활동준비를 하며 귀만 소머즈처럼 쫑긋 세워야 합니다.
"여보, 다녀왔어요?"
"우리 아기 밥 먹자" 같은 다정한 말들이 오가는 가 싶더니, 갑자기 공기가 심상치 않게 변합니다.
교실을 한 바퀴 돈 아빠역의 민준이는 자신이 들고 있던 옷을 매트에 툭 던지더니 벌러덩 드러눕습니다.
"아, 피곤해.. 나 좀 쉴 거야. 건드리지 마."
그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다 엄마역의 다은이의 눈빛이 매섭게 변합니다.
장난감 칼로 도마를 '탁! 탁! 탁!'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내려치며 요리를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뒤를 휙 돌아보며 소리칩니다.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양말 좀 똑바로 벗어 놓으라고 했지!"
순간 저는 정리하던 책들을 떨어트릴 뻔했습니다.
5살 어린이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나 야무진 말투와 능청스러운 표정, 그야말로 어느 집의 실제상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생생한 '안방극장'이었습니다.
민준이가 귀찮다는 듯 돌아누우며 지지 않고 대꾸합니다.
"아. 잔소리 좀 그만해! 밖에서 일하고 와서 힘들다고!!"
그러자 다은이가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리고는, 기가 막히다는 듯 '허!'하고 헛웃음을 짓습니다.
"일은 당신만 해? 나도 하루 종일 일하고 애보고 하거든, 못살아 정말!"
어젯밤, 혹은 그 어느 저녁엔가 이 두 친구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선생님은 숨을 죽이고 모르는 척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실제상황을 담은 부부싸움 현장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싸움은 어른들보다 뒤끝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 둘은 화해모드가 되어 식탁 앞에 마주 보고 앉습니다.
"이거 맛있네" 너스레를 떠는 민준이의 말에 까르르 웃는 다은이입니다.
오늘 우리의 역할놀이는 어른들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고, 어른들의 화해보다 더 달콤하게 막을 내립니다.
아이들의 놀이에서 재생되는 리얼리티 생중계, 무엇을 하고 있든 거울같이 반영해 주는 아이들의 시선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유아기는 주변 세계를 관찰하고 이를 놀이 속에 재현하며 사회적 관계와 정서적 이해를 확장하는 시기입니다. 3~7세 아이들은 부모의 대화나 일상에서 접한 갈등과 화해의 장면을 그대로 옮겨와 역할놀이로 풀어내는데, 이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발달적 과정입니다.
민준이와 다은이가 소꿉놀이 속에서 부부의 갈등을 재현하고 다시 화해하는 모습은 유아기의 상징적 사고와 사회적 학습이 동시에 작동하는 순간이며,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갈등 상황을 안전하게 탐색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관계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또한 서로의 대사를 주고받으며 감정을 담아내는 과정은 언어 발달과 정서적 공감 능력을 키우는 기회가 되고, 교사가 직접 개입하지 않고 귀만 열어두는 태도는 아이들이 스스로 관계를 조율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교육적 배려가 됩니다.
이처럼 유아기의 역할놀이는 단순한 흉내내기가 아니라 아이들이 사회적 규칙을 배우고 정서적 경험을 소화하며 자기 효능감을 키워가는 중요한 발달적 장치입니다. 아이들은 놀이 속에서 갈등을 겪고 화해를 경험하며, 이는 실제 생활에서의 관계 형성과 문제 해결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러한 장면은 유아기의 발달적 특징인 모방, 상상, 사회적 협력, 정서적 표현이 응축된 교육적 순간으로,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관계를 이해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따뜻한 성장의 경험을 만들어 갑니다.
ㅣ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는 말, 실감하시나요?
내가 무심코 던진 말투,
한숨 쉬는 습관까지 아이들은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있습니다.
ㅣ 오늘 아이가 본 부모님의 모습은 어떤 장르였을까요?
내일 혹은 그 어느 날엔가 상영될 우리 집 이야기가
따뜻한 '가족 시트콤'이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