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서 만난 초등학교 2학년 지훈이 어머니는 아이의 학습 문제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선생님, 우리 애가 머리가 나쁜 걸까요? 아니면 저를 놀리는 걸까요?
방금 전까지 저랑 같이 구구단을 완벽하게 외웠거든요. 그런데 아빠 앞에서 한 번 해보라고 하거나, 제가 정색하고 다시 물어보면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돼요. 아까 다 외웠던 거라고 다그치면 그제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모른다고 해요. 방금 전까지 분명히 다 알았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어머니는 아이가 집중을 안 하거나 꾀를 부린다고 생각하여 무척 답답해하셨습니다. 하지만 지훈이는 꾀를
부린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뇌 속에서는 방금 전까지 잘 저장되어 있던 기억의 문이 굳게 닫혀버린 것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고 기억할 때, 뇌 속에서는 해마라는 기관이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해마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넘겨주는 중요한 저장소이자 통로입니다.
그런데 이 해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바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인 코르티솔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엄격한 표정을 보거나 다시 해봐, 똑바로 말해봐라는 압박감을 느끼는 순간,
아이의 뇌는 이것을 생존을 위협하는 스트레스 상황으로 인식합니다.
이때 뇌에서는 코르티솔이 폭발적으로 분비되어 뇌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안타깝게도 해마에는 이 코르티솔을 받아들이는 수용체가 아주 조밀하게 모여 있습니다.
과도한 코르티솔이 해마를 덮치면, 기억을 꺼내고 저장하는 해마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버립니다.
부모님들은 아이가 대답을 못 하면 생각해 봐! 아까 했잖아! 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합니다.
아이가 긴장해서 집중하면 기억을 되살려 낼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부모의 다그침은 아이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이는 더 많은 코르티솔 분비로 이어집니다.
결국 해마는 완전히 기능을 멈추고, 아이의 머릿속은 말 그대로 새하얗게 백지장처럼 변해버립니다.
방금 전까지 선명했던 정답이 진짜로 기억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지훈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것은 엄마를 놀리려던 것이 아니라,
코르티솔의 습격으로 인해 뇌의 기억 회로가 일시적으로 차단되었기 때문입니다.
학습 효율을 높이려면 아이의 뇌가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껴야 합니다.
뇌가 위협을 느끼면 학습과 기억을 담당하는 시스템은 가장 먼저 전원을 끄고 생존 모드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외우거나 대답할 때 멈칫거린다면, 채근하는 대신 잠시 기다려 주세요.
부드러운 눈빛과 따뜻한 목소리로 괜찮아, 천천히 생각해 봐. 틀려도 아무 문제없어라고 말해주는 순간,
아이의 뇌에서는 코르티솔 수치가 떨어지고 멈췄던 해마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아이의 기억력을 살려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매서운 채찍질이 아니라, 부모의 다정한 품입니다.
Q. 적당한 스트레스나 긴장감은 학습에 도움이 된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A. 맞습니다.
약간의 긴장감은 주의력을 높여 학습에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아이가 느끼는 긴장감이 안전의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 그것은 독이 됩니다. 부모가 평가자가 되어 매서운 눈으로 바라볼 때 아이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적당한 긴장'을 훨씬 뛰어넘는 공포에 가깝습니다. 집에서 부모와 함께할 때만큼은 평가의 긴장감보다는 완벽하게 수용받는다는 안전감이 더 필요합니다.
해마를 살리는 코르티솔 디톡스 스킨십
뇌를 마비시키는 코르티솔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해독하는 천연 진정제는 바로 사랑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입니다.
실천 방법: 아이가 무언가를 외우다가 긴장해서 입을 다문 모습을 보이면, 다그치는 대신 문제집을 잠시 덮습니다.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우리 지훈이가 지금 헷갈리나 보구나. 엄마랑 3분만 안고 쉬었다가 하자"라고 말해줍니다.
뇌과학적 원리: 불안이나 압박감을 느낄 때 분비되는 코르티솔은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보내는 해마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차단합니다. 이때 부모의 따뜻한 스킨십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뇌에서 옥시토신을 폭발적으로 분비하게 만듭니다. 옥시토신은 코르티솔의 천적과 같아서, 뇌를 습격했던 스트레스 호르몬의 농도를 급격히 낮추고 닫혀 있던 기억의 창고 문을 다시 부드럽게 열어줍니다.
뇌과학적 근거: 접촉 위안에 관한 신경과학 연구들에 따르면, 부드럽고 일정한 속도의 등 쓰다듬기는 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고 옥시토신 수치를 극적으로 높입니다. 옥시토신이 뇌에 퍼지면 편도체의 과각성이 진정되고, 코르티솔로 인해 기능이 멈추었던 해마의 신경 회로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인지 능력이 회복된다는 사실이 여러 뇌영상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