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주, 목요일
정기적으로 그림책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구성원들은 선생님들이기도 하지만,
그림책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직업의 어른들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그림책을 통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주제활동으로 함께하는데, 몇 주간의 활동을 함께 하다 보면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레 사적인 이야기들도 오가게 됩니다.
그러던 중 참가자 한 분이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나 완전 테린이야. 공도 못 치고, 라켓도 이상하게 잡고."
이 말에 모두 웃으며 공감했지만,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테린이'라는 말.
이 말에는 귀엽고 겸손한 표현도 담겨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왜 우리는 서툰 자신을 표현할 때마다 '어린이'를 빌려오는 걸까요?
'주린이' '골린이' '부린이' 등
주변을 돌아보니 대상만 다를 뿐 이러한 표현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어린이는 미숙함의 상징일까요?
아니면 배우는 존재, 가능성의 존재일까요?
함께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처음 색연필을 손에 잡고 선을 따라 조심조심 옮기던 손길,
익숙하지 않은 가위를 손가락에 끼고 삐뚤빼뚤 자르던 종이 조각들,
종이의 끝부분을 잘 맞춰보겠다며 애쓰지만 자꾸만 어긋나는 모서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꼭 다물던 그 표정까지.
그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서툴지만 진지했던, 익숙하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작지만 단단했던 아이들의 시작을요.
'테린이' '골린이' '부린이'
그 말들이 귀엽게 들리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던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을 '미숙함의 상징'으로 빌려 쓰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처음의 용기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들의 서툰 손길은 우리의 시작보다 훨씬 더 용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만일에라도 '0린이'라는 표현을 단순히 아이들의 미숙한 부분을 떠올리며 쓰셨더라면
아이들의 시작은 용감하고 대단하고, 충분히 응원받아 마땅하다는 걸 잠시라도 생각해 주길 바라봅니다.
유아기는 '나'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배워가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모든 것이 처음이고,
그 처음을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느끼고 배웁니다.
색연필을 처음 쥐는 손,
가위를 서툴게 다루는 손가락,
종이의 모서리를 맞추려 애쓰는 눈빛,
이 모든 순간은 단순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어가는 과정입니다.
아이들은 서툴지만 진지하게,
익숙하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작지만 단단하게 시작합니다.
이때 어른이 건네는 말과 시선은 아이의 자존감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서툴지만 괜찮아' '다시 해보자'
'처음인데도 열심히 잘했는데'
이런 말들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언어입니다.
반대로, 어른들이 자신의 미숙함을 표현할 때마다
'어린이'를 빌려오는 언어를 반복한다면,
아이들은 자신이 아직 '제대로 되지 않은 존재'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를 '아직 덜 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 충분한 존재로 바라볼 때,
비로소 아이는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자존감이라는 내면의 뿌리를 튼튼히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테린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ㅣ 아이의 서툰 시도를 어떻게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부족한 모습'으로 보나요, '시작의 용기'로 보나요?
ㅣ '0린이'라는 말을 써본 적 있나요? 그 말을 쓸 때,
그 안에 담긴 시선까지 함께 돌아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