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판 칼럼 필진_이혁재
오늘 <이혁재의 목숨짓기와 개인되기>에서는 서울 강남구 자곡동에 있는 강남못골도서관에서 했던 내 강의를 되돌아보려고 해. 이 강의는 지난 11월 20일에 있었지. 한의원에서 침을 맞던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도서관에 내 강의를 추천했어.
침을 놓으면서 침을 맞는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나는 있거든. 그런데 내 생각에 귀기울여주던 그 사람이, 여럿이 함께 듣고 싶어서 도서관 게시판에 강의 추천을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오늘 편지에서는 '강남못골도서관 강의에서 나눈 생생한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건네주고 싶어.
이날 강의에서 가장 생생했던 사건은, 궁금한 것을 묻고 대답해가면서 강의 제목이 점점 또렷하게 바뀌었다는 거야. 처음에는 <숨짓기와 개인의 발견>이었던 강의 제목이, 마무리될 무렵에는 <목숨짓기와 개인되기>로 바뀌게 됐어. 아무래도 <숨>이라고 할 때보다 <목숨>이라고 할 때, 간절하고 절실한 삶의 의지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겠더라.
마찬가지로 <개인의 발견>이라고 할 때보다 <개인되기>라고 할 때, 스스로 나름대로 삶을 만들어가는 느낌이 더욱 또렷해지더군. 마치 어린 꽃봉오리가 어느 날 문득 피어나듯,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목숨짓기와 개인되기>라는 제목이 활짝 피어난 것만 같더라.
이제부터는 <목숨짓기>와 <개인되기>라는 꽃봉오리가 피어난 사건을 짧게 돌이켜볼게. 먼저 <숨짓기>에서 <목숨짓기>로 바뀐 것부터 이야기할게. 나는 <숨짓기>를 '몸짓기와 말짓기와 글짓기와 삶짓기를 통해서 숨쉴 틈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어.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몸-말-글-삶이 어울릴 수밖에 없다는 거지.
그런데 "살아있다는 것은 뭘까요?"라고 내가 물었더니, 누군가가 "목숨이 붙어있는 거죠."라고 대답하더라구. 그 때 문득 '<숨짓기>를 좀더 절실하게 <목숨>이라고 바꿔쓰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
나는 이때의 목은 머리와 몸통을 잇는 곳과 함께 발목과 손목까지 담은 거야. 똑바로 설 수 있도록 돕는 발목과 잘 만들 수 있도록 돕는 손목이 생각과 감정을 어울리도록 돕는 목과 함께 <목숨짓기>를 제대로 한다고 본거지.
<목숨짓기>라는 낱말이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문득 떠올랐던 것처럼, <개인되기>도 마찬가지로 떠올랐어. 앞서 말했듯이 처음 강의 제목에는 <개인의 발견>이라고 적혀 있었지. 그런데 강의를 하면서, 달라지더라.
▶ 나를 깨우는 일기쓰기와 자기 얼굴 그리기
▶ 너를 그리는 편지쓰기와 초상화 그리기
▶ 나와 너와 그가 함께 어울리는 소설쓰기와 인물풍경 그리기
에서 사람들은 개인을 발견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해.
그렇지만 이때의 개인은 이미 주어진 개인이 아니라, 지금까지 없었던 나라고 할 수 있어지. 사람들은 '내 안에 이미 숨겨진 개인을 발견한다기보다는,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없었던 나를 비로소 개인으로 만들어간다'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개인되기>가 더 낫겠다 싶다는 생각이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문득 떠오르게 됐지. 마치 노먼 록웰이 그린 <삼중 자화상>에서처럼 여러 나를 만들어 내는 것과 비슷해.
오늘의 편지를 마무리할 때가 왔네. 마지막으로 법철학자인 드워킨의 한마디를 [고슴도치를 위한 정의(Justice for Hedgehogs)]에서 뽑아 함께 나누고 싶어.
삶은 기대와 보상의 다져진 바퀴 자국을 따라 무의식의 습관들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드워킨은 이처럼 주어진 삶에 더해서 새로 짓는 삶이야말로 사람다운 삶이라고 하는 것 같아. 이는 살아있는 동안 너의 목숨이 그저 붙어있는 것을 넘어서 몸짓기와 말짓기와 글짓기와 삶짓기로 피어나길 바라는 것이기도 할거야.
이 글을 읽는 네가 어느 하루도 생생하지 않은 날이 없기를 바랄게. <목숨짓기>가 <개인되기>로 이어져 '존엄한 사람들, 자유로운 사람들, 평등한 사람들'로 다들 피어나도록 서로 애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