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데카콘 '캔바 (Canva)' 멜라니 퍼킨스 창업스토리 1탄
여인들의 심박수를 요동치게 만드는 티파니(Tiffany & Co.)의 시작은 1837년 뉴욕 브로드웨이의 작은 문구점이었다.
첫날 그들이 벌어들인 매출은 고작 4달러 98센트. 그 초라한 장부가 지금의 거대한 보석 제국을 예고할 것이라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아함의 대명사 샤넬(Chanel)의 첫 출발 역시 1910년 파리 캉봉 거리의 비좁고 허름한 모자 가게에 불과했다.
고아원 출신의 가난한 재봉사가 귀족들의 화려한 드레스 사이에서 무채색의 밋밋한 모자를 팔기 시작했을 때, 세상은 그녀를 비웃었다.
우리는 흔히 거대한 제국이 완성해 낸 영광의 꼭대기만을 바라보며 그 위용에 압도당한다.
하지만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타인의 위대한 성취 앞에서 불안과 우울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의 완벽하게 가공된 현재의 빛나는 모습과 우리의 초라하고 혼란스러운 시작점을 불공평하게 비교하기 때문이라고.
수만 번의 실패와 피눈물 나는 궤적은 신화라는 이름 아래 말끔히 표백되고, 오직 성공의 결과값만이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든다.
하지만 흔들리지 말고 기억하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위대한 것들의 첫 페이지는, 예외 없이 소박하고 때로는 한없이 초라했다는 것을.
현재 전 세계 2억 6천만 명의 사용자. 초당 400개 이상의 디자인이 실시간으로 창조되는 시각 혁명의 진원지.
유튜브 크리에이터와 마케터들, 그리고 전 세계의 직장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기업, 캔바(Canva)의 시작도 이 위대한 법칙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첫 무대는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의 빛나는 유리 빌딩이 아니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호주 퍼스(Perth) 외곽의 낡은 주택가. 그곳에서도 가장 구석진 거실, 어머니가 쓰던 소박한 소파 위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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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서호주 대학교(University of Western Australia)의 낡은 컴퓨터실.
웅웅거리는 본체 냉각팬 소리 사이로 짜증 섞인 한숨이 툭툭 터져 나왔다.
열아홉 살의 대학생 멜라니 퍼킨스는 한 학생의 등 뒤에 서서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학생의 손은 마우스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피로감과 긴장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화면 속에는 마치 미로처럼 얽혀 있는 수십 개의 메뉴 바와 복잡한 레이어 창이 어지럽게 띄워져 있었다.
고작 대학 축제 포스터 귀퉁이에 짧은 텍스트 상자 하나를 집어넣고, 사진의 배경을 조금 잘라내는 일.
지금이라면 스마트폰으로 단 3초면 끝날 그 단순한 결과를 얻기 위해, 당시의 사람들은 몇 주 동안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 프로그램 사용방법을 배우거나 텍스트로 가득한 매뉴얼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버튼 하나를 잘못 누르면 작업하던 파일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고, 컴퓨터는 수시로 뻗어버렸다.
당시의 디자인 산업은 소수를 위해 굳게 닫힌 거대한 철옹성이었다.
수십만 원, 때로는 수백만 원에 달하는 무거운 프로그램을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깔 돈이 있는 자. 그리고 그 복잡한 암호 같은 단축키와 기능을 다룰 줄 아는 극소수의 전문가들만이 누릴 수 있는 배타적인 전유물.
학생들을 가르치며 용돈을 벌던 멜라니는 이 거대한 폭력과도 같은 불합리한 장벽 앞에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내 머릿속의 생각과 상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이토록 고통스럽고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할까?'
시대의 공기는 이미 미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무거운 프로그램을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설치해야만 했던 폐쇄적인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페이스북과 마이스페이스가 세상을 연결하며, 인터넷 브라우저 창만 띄우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클라우드의 거대한 바람이 막 불어오고 있었다.
멜라니는 상상했다.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필요 없이, 그저 웹 브라우저에 접속해 마우스 드래그 앤 드롭 몇 번이면 완벽한 디자인이 뚝딱 완성되는 직관적이고 보편적인 도구를.
하지만 그녀의 상상은 찻잔 속의 태풍보다도 미약했고 허황되어 보였다.
그녀는 고작 남들보다 디자인 툴을 조금 더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력서에 쓸 경력 한 줄조차 없는 무명 대학생일 뿐이었다.
그녀의 학생들이 매일 고군분투하며 싸우고 있는 그 거대한 디자인 툴을 만든 회사는 지구 반대편 미국에 군림하고 있는, 이름만 들어도 숨이 막히는 굴지의 글로벌 대기업이었다.
하지만 비즈니스의 진정한 혁신은 매끄러운 프레젠테이션이 오가는 거창한 회의실이 아닌, 타인의 깊은 불편함을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집요하고도 순수한 연민에서 싹을 틔운다.
멜라니는 자신이 가르치던 교사와 학생들이 매년 졸업앨범을 만들 때마다 겪는 끔찍한 고통에 주목하기로 했다.
복잡한 소프트웨어의 오류와, 툭하면 수십만 원의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오만한 외주 디자인 업체 사이에서 사람들이 겪는 불합리와 비효율.
멜라니는 누구나 아주 쉽게, 마치 게임을 하듯 졸업앨범을 조립할 수 있는 웹 기반의 맞춤형 서비스를 기획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다니던 대학을 자퇴했다.
그녀는 어머니 집 거실 한구석의 먼지를 쓸어내고 중고 컴퓨터 두 대를 나란히 세팅했다.
남자친구 클리프 오브레히트와 단둘이 자본금 없이 차린 그녀의 첫 번째 회사, 퓨전 북스(Fusion Books)가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멋진 기술력이나 실리콘밸리의 풍부한 벤처 자본 따위는 없었다.
거실 바닥에 엎드려 밤새워 인터페이스 레이아웃을 스케치하고, 다음 날엔 직접 동네 인쇄소를 찾아가 매캐한 종이 먼지를 마시며 인쇄와 제본의 생리를 밑바닥부터 몸으로 부딪치며 배웠다.
웹에서 대충 만들어진 디자인 레이아웃이 실제 인쇄소의 복잡한 조판 흐름에 정확히 맞물려 변환되도록, 그들은 몇 달이고 성실하고 집요하게 조악한 시스템의 뼈대를 뜯어고쳤다.
소프트웨어 버그에 불만을 품은 학교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 "당장 거기 책임자 바꿔!"라고 불같이 화를 낼 때면, 거실에서 함께 포장 박스를 접던 20대 초반의 남자친구 클리프가 나섰다.
그는 황급히 목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한 뒤, 마치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후한 중년의 매니저인 척 목소리를 굵게 내리깔고 능청스럽게 연기를 했다.
퓨전 북스의 초창기는 번듯한 고객 센터와 대규모 디자인 팀이 존재하는 척 위장해야만 했던, 그야말로 눈물겹고 우스꽝스러운 처절한 촌극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 비좁고 볼품없는 호주의 주택가 거실은, 그 어떤 명문 대학의 경영대학원보다 위대하고 정교한 배움의 터전이자 비즈니스 실험실이었다.
단 한 번도 전문적인 디자인 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평범한 학생과 나이 지긋한 선생님들이, 퓨전 북스 웹사이트에 접속해 마우스 드래그 몇 번만으로 기적처럼 완벽한 퀄리티의 졸업앨범을 척척 찍어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골리앗을 향해 던진 멜라니의 최초 가설이, 부정할 수 없는 날것의 트래픽과 매출 데이터로 완벽하게 증명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퓨전 북스는 입소문을 타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아르바이트로 상상도 하지 못했을 규모의 현금이 거실 임시 사무실의 낡은 통장으로 들어왔다.
지독했던 고생은 끝났다.
그대로 호주에 남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한 스타트업 CEO 타이틀을 달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 탄탄대로가 열렸다.
하지만 어느 늦은 밤.
모두가 잠든 텅 빈 거실에서 마지막 매출 장부를 덮은 멜라니의 눈빛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그녀의 심장은 안도감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거대한 갈증으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가설 증명은 끝났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이 이토록 쉽게 전문가 수준의 앨범을 만들어낸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전단지, 레스토랑 메뉴판, 명함, 프레젠테이션, 웹사이트를 스스로 만들지 못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졸업앨범 시장의 1위라는 타이틀은 달콤했지만, 멜라니에게 그것은 그저 전 세계 80억 인구를 무대로 삼기 위해 거쳐 간 아주 작은 테스트베드에 불과했다.
세상의 권력을 소수에게서 다수에게로 옮겨오는 진짜 혁명.
그녀는 매년 확실한 수익을 벌어다 주는 안정적인 돈줄과 따뜻한 고향의 안락함을 미련 없이 뒤로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오만하며, 가장 치열한 천재들이 모여있는 전 세계 창업의 본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클리프, 짐 싸. 실리콘밸리로 가자!"
글로벌 소프트웨어 제국의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그들과 어깨를 겨눌 거인을 만들기 위한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그리고 퍼스 공항을 이륙하는 이 비행기 티켓은, 야심 찬 호주의 20대 젊은 남녀가 낯선 이방의 땅에서 무려 100번의 치욕적인 거절과 멸시를 온몸으로 맞이하게 될 끔찍한 지옥행 티켓이기도 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