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데카콘 '캔바 (Canva)' 멜라니 퍼킨스 창업스토리 2탄
"긍정적으로 검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남기는 이 정중하고 세련된 미소와 인사는, 사실상 영원히 연락하지 않겠다는 끔찍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낡고 비좁은 모텔 방. 딱딱한 노트북 화면 위로 거절을 알리는 100번째 이메일이 야속하게 떠 있었다.
벌써 백 번째였다. 메일함에 쌓인 수많은 'No'라는 단어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당시 세계 기술의 심장부라 불리는 캘리포니아 팰로앨토의 샌드힐 로드(Sand Hill Road)에서, 멜라니 퍼킨스와 클리프 오브레히트는 그곳 투자자들의 잣대에 비추어 볼 때 완벽에 가까운 오답이었다.
그들은 실리콘밸리의 엘리트 네트워크에 속하지 않은 20대 초반의 새파란 대학 중퇴자 애송이들이었고,
IT 혁신의 중심지에서 비행기로 무려 열네 시간이나 떨어진, 이름조차 생소한 호주 퍼스(Perth) 출신의 촌뜨기들이었으며,
무엇보다 이 거대하고 미친 아이디어를 인터넷 브라우저 위에서 실제로 지연 없이 구현해 낼 월드 클래스급 천재 개발자, 즉 테크 코파운더(Tech Co-founder)가 팀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디자인 소프트웨어 시장은 이미 수백억 달러 규모의 공룡인 어도비(Adobe)가 꽉 잡고 완벽한 해자를 구축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이기겠다는 거죠? 무거운 포토샵을 브라우저 위에서 가볍게 돌리겠다니, 대책 없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군."
수없이 반복되는 냉소와 거절.
어떤 투자자는 프레젠테이션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루하다는 듯 턱을 괴고 하품을 하며 시계를 보았고, 어떤 이는 아예 노트북을 덮어버리며 그녀의 말을 끊고 다음 미팅 장소로 가버렸다. 철저한 투명 인간 취급이었다.
매일 밤 싸구려 모텔 방에 돌아와 피치 덱(Pitch Deck)을 고치며 멜라니는 창백해진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들을 멍청이 취급했던 투자자들의 정중하지만 날 선 질문들과 회의에 찬 의심들을 모조리 노트에 적어 내려가며 거절의 진짜 이유를 냉정하고 집요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그들의 오만한 논리를 부수기 위해 매일 밤 프레젠테이션의 약점을 지워나가며 비즈니스 모델을 더 날카롭게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주 퍼스에서 열린 작은 비즈니스 콘퍼런스.
수많은 인파 속을 걷던 멜라니의 시야에 믿을 수 없는 인물이 들어왔다.
줌(Zoom), 트윗덱(TweetDeck)을 비롯해 훗날 수많은 유니콘 기업을 초기에 발굴해 낸 실리콘밸리의 전설적인 벤처 투자자, 빌 타이(Bill Tai)였다.
'지금이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평생 우리에게 두 번 다시 실리콘밸리로 향하는 문은 열리지 않아.'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지만, 그녀는 다짜고짜 그에게 다가가 캔바의 원대한 청사진과 퍼블리싱 시장의 폭발적인 미래를 폭포수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빌 타이는 그녀가 혼신을 다해 땀을 쥐며 열변을 토하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스마트폰 자판만 무심하게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상대방과 단 한 번의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는 철저하고도 오만한 무례함.
멜라니의 등줄기에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 101번째 거절이구나. 이 엄청난 거물은 지금 지구 남반구 변방에서 온 무명 창업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거야….'
속으로 짙은 절망과 수치심을 삼키며, 애써 웃는 얼굴로 뒷걸음질 치려던 찰나였다.
스마트폰에서 천천히 눈을 뗀 빌 타이가 불쑥, 전혀 예상치 못한 한마디를 허공에 던졌다.
"하와이에서 열리는 마이타이(MaiTai) 캠프에 오지 않겠어요?"
멜라니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듯 커졌다.
그는 그녀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설명하는 직관적인 브라우저 기반 디자인 플랫폼의 폭발적인 잠재력에 단숨에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즉시 실리콘밸리의 다른 거물 투자자들에게 멜라니를 소개하는 단체 문자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리콘밸리 벤처 생태계의 막대한 자본과 권력이 숨 쉬는 은밀한 이너 서클에 단숨에 들어갈 수 있는 기적 같은 황금 티켓.
하지만 그 빛나는 티켓에는 거칠고 도전적인 입장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빌 타이가 초대한 마이타이는 단순히 멋지게 차려입고 우아하게 사업 아이템을 논하는 평범한 네트워킹 자리와는 달랐다. 하와이 마우이(Maui) 섬에서 매년 열리는 이 행사는 익스트림 스포츠인 카이트보딩(Kiteboarding) 휴가와 실리콘밸리의 비즈니스 네트워크가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매 년 행사가 열리면 약 100여 명의 실리콘밸리 창업자, 벤처 투자자, 기술자, 그리고 운동선수들이 모여 낮에는 바다에서 카이트보딩을 즐기고, 밤에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파티를 하며 기술 혁신에 대한 토론을 나누거나 실제 투자 거래(Deal)가 진행되는 그들만의 행사였다.
한편, 멜라니는 평생 단 한 번도 카이트서핑의 '카' 자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제껏 바다의 거친 파도와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익스트림 스포츠는 모니터 앞에서 마우스로 디자인 툴만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고요한 삶과는 완벽히, 철저하게 동떨어진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거대한 자본의 흐름은 종이 쪼가리 위의 완벽한 숫자나 사업 계획서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신뢰와 동지애, 그리고 우리는 어떤 위험 속에서도 함께한다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끈적한 거미줄을 타고 흐른다는 것을 멜라니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들의 견고하고 배타적인 성벽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들이 마시는 물을 마시고 그들이 타는 파도에 기꺼이 맨몸을 던져야만 했다.
망설임은 단 1초도 없었다. 그녀는 당장 호주의 거친 바다로 달려가 혹독한 카이트서핑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카이트서핑은 초보자가 며칠 만에 덤비기에 결코 만만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바람의 흐름을 읽지 못한 가냘픈 몸이 거대한 낙하산에 질질 끌려다녔고, 역겨운 바닷물을 수십 번이나 들이마시며 구역질을 해댔다. 엄청난 속도로 수면 위를 날다가 보드에서 튕겨 나가 바다에 처박힐 때면 온몸이 시퍼런 멍으로 참혹하게 얼룩졌다.
거친 모래바닥에 얼굴이 갈리고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와 아찔한 죽음의 공포마저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매일 짠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기침을 토해낼 때마다,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위험은 고작 신체적 부상이지만, 보상은 세상을 바꿀 회사의 설립이다. 반드시, 기필코 실리콘밸리에서 인정받고 말겠어.'
세상에서는 때로 아이러니하게도 치밀한 머리나 정교한 논리가 아닌, 자신의 가장 취약한 육체를 기꺼이 멍투성이로 내던지는 날것의 간절함이 훨씬 더 크고 묵직한 설득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와이 마우이섬의 눈부신 해변. 수억 달러를 굴리는 노련한 투자자들은, 거칠고 잔혹한 파도 속에서도 수백 번 튕겨 나가고 고꾸라지면서도 기어코 다시 보드 위로 악착같이 기어오르는 멜라니의 지독한 눈빛과 짐승 같은 근성을 조용히, 그러나 아주 깊은 인상을 받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며칠 뒤.
온몸에 짠 소금기가 찌들고 멍투성이가 된 채 헐떡이는 멜라니를 향해, 해변 모래사장에 서 있던 빌 타이가 마침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거친 파도를 기어코 이겨내는 당신의 그 지독함과 집념이라면, 그 어떤 풍파 앞에서도 살아남아 해낼 수 있겠군요. 당신의 회사에 투자하겠습니다."
숨 막히게 길고 어두웠던 100번의 거절 끝에 마침내 거대한 제국의 첫 번째 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는 찬란한 순간이었다.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있던 멜라니와 클리프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지르려던 찰나, 등을 돌려 걸어가려던 빌 타이가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이 덧붙였다.
"단, 전제 조건이 딱 하나 있어요."
태양 빛을 등진 빌 타이가 차분하게 덫붙였다.
"당신들의 그 멋지고 훌륭한 비전을, 현실의 코드로 완벽하게 구현해 줄 월드 클래스급의 천재 개발자를 팀의 공동 창업자로 영입하세요. 그게 내 유일한 조건입니다."
순간 멜라니의 귓가에 들려오던 경쾌한 파도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가까스로 좁은 지옥 문 하나를 열고 천국에 닿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문 너머엔, 앞서 겪었던 100번의 거절이나 카이트서핑의 고통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거대하고 캄캄한 절벽이 기괴하게 입을 벌린 채 그녀를 조롱하듯 기다리고 있었다.
번듯한 사무실은커녕 당장 내일 아침 회사가 공중분해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호주 변방 출신의 무명 스타트업.
가진 것이라고는 두 젊은이의 열정과 조악한 프로토타입뿐인 이 위태로운 벼랑 끝의 상황.
대체 실리콘밸리의 수십만 달러 연봉과 스톡옵션을 걷어차고, 어느 정신 나간 미친 천재 개발자가 이 낡고 조그만 돛단배에 스스로 제 발로 올라탄단 말인가?
하와이의 찬란한 태양 아래서, 멜라니의 시선이 까마득하고 텅 빈 허공을 향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