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명의 무료 사용자와 독이든 성배

디자인 데카콘 '캔바 (Canva)' 멜라니 퍼킨스 창업스토리 6탄

by 똘똘이스머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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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인 사용자 수의 증가는 캔바에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맹독이었다.


클라우드 브라우저 위에서 무거운 그래픽을 지연 없이 구동하는 렌더링 시스템은, 뒷단에서 끔찍할 만큼 막대한 서버 연산 능력을 무자비하게 요구했다.


전 세계 100만 명의 사용자들이 초당 수십 개의 고화질 디자인을 척척 생성하고 다운로드 버튼을 누를 때마다, 캔바가 매달 아마존 웹 서비스(AWS)에 지불해야 하는 클라우드 청구서의 숫자는 미친 듯이 팽창하고 있었다.


힘들게 투자받은 피 같은 시드 머니는,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혹은 거대한 용광로에 지폐 뭉치를 던져 넣듯 허무하게 서버 비용으로 증발하고 있었다.


시드니 본사의 좁은 회의실 공기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멜라니. 아무리 트래픽이 치솟아도 이대로 가다간 정확히 반년 안에 우리 현금 보유고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냅니다. 자금 소진이 너무 빨라요."


재무팀의 경고는 무거웠고, 모니터에 뜬 재무제표의 런웨이(Runway, 생존 가능 기간) 그래프는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위대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어떠한 외부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 자체를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맹목적이고도 본능적인 관성을 일컬어 코나투스(Conatus)라고 불렀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이상조차도 당장 오늘을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의 밥벌이, 즉 이 코나투스가 충족되지 않으면 한낮 허황된 몽상으로 흩어져버리고 만다.


아무리 '디자인 권력의 민주화'라는 캔바의 사명이 위대할지라도, 그것을 세상에 끝까지 증명해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캔바라는 회사 자체가 파산하지 않고 살아서 숨을 쉬어야만 했다.


멜라니 퍼킨스는 창업 이래 가장 두려운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에 섰다.


기존의 '완전 무료' 정책을 고집하며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들에게 명운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캔바를 열광적으로 사랑해 준 100만 명의 충성스러운 초기 사용자들에게 '과금'이라는 청구서를 들이밀 것인가.


스타트업 생태계의 역사를 돌아보면, 초기에 막대한 무료 트래픽을 모은 뒤 자금난을 이기지 못해 갑자기 유료화로 전환했다가 대중의 맹렬한 분노와 배신감을 사고 하루아침에 몰락해 버린 서비스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캔바를 찬양하던 100만 명의 열성 팬이, 순식간에 회사를 물어뜯는 안티로 돌변할 수도, 다른 유사 서비스나 대안으로 이탈할 수도 있었다.


여러 날의 고민 끝에, 멜라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반 대중(B2C)과 학생들을 향한 기본 무료 기능은 지금처럼 무료로 유지합시다. 그게 우리 캔바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니까요. 대신, 우리는 기꺼이 지갑을 열 확실한 명분이 있는 사람들을 정밀하게 타겟팅해서 유료화를 하는겁니다. 바로 '기업'고객 말입니다."


2015년.


캔바 팀은 뼈를 깎는 아키텍처 재설계와 개발 끝에 마침내 B2B 전용 프리미엄 모델인 'Canva for Work (현 Canva Pro)'를 세상에 내놓았다.


일반인들과 영세 소상공인들은 기존처럼 무료로, 아무런 제약 없이 수만 개의 템플릿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즈니스'목적으로 '시간 단축'이 보다 중요한 사용자에게는 정당한 비용의 지불을 요구했다.


팀원들 간에 회사의 브랜드 로고와 메인 컬러 팔레트를 클라우드로 실시간 공유하고, 기업 전용 폰트를 완벽하게 통일하며, 클릭 단 한 번의 매직 리사이즈(Magic Resize) 기능으로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 배너 사이즈를 1초 만에 자동 변환해야 하는 사람들. 정기적으로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전문가들.


즉 시간의 효율이 곧 막대한 돈과 직결되는 '프로 마케터'와 '기업의 디자인 팀'에게는 매달 구독료를 기꺼이 지불하고도 남을 압도적이고 중독적인 편의성을 제공한 것이다.


직원들은 집에서 사적인 모임의 전단지나 개인 SNS 이미지를 만들 때 캔바의 무료 기능을 쓰며 그 압도적인 직관성에 완벽하게 길들여진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서는, 그 답답하고 무거운 기존의 디자인 프로그램을 버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캔바의 유료 기업용 솔루션을 회사 법인카드로 결제해 달라고 상사에게 요구하게 된다.


일반 대중의 일상을 먼저 완벽하게 흡수한 뒤, 그들이 스스로 기업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영리하고도 거대한 락인(Lock-in) 생태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수많은 글로벌 스타트업과 포춘 500대 기업들이 앞다투어 캔바의 유료 플랜을 정기 구독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서버 비용으로 허덕이며 말라비틀어져 가던 회사의 텅 빈 통장에, 마침내 현금이 거대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2017년.


캔바는 더 이상 외부 벤처 캐피털의 자금 수혈이나 간섭 없이도 독립적으로 완벽하게 생존할 수 있는, '흑자 전환(Profitability)'소식을 전 세계에 발표했다.


자본주의의 가장 든든한 날개, '막대한 현금 창출력'을 장착한 이후 캔바의 행보는 굶주린 포식자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벌어들인 엄청난 잉여 현금을 바탕으로, 전 세계 최대의 무료 고해상도 이미지 저장소인 펙셀스(Pexels)와 픽사베이(Pixabay) 등 유망한 시각 기술 기업들을 잇달아 무서운 속도로 집어삼키며 자신들의 해자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초창기 단순한 1장짜리 포스터나 카드뉴스를 만드는 귀여운 제작 툴이었던 캔바는, 어느새 전문가급의 프레젠테이션, 고화질 동영상 편집, 반응형 웹사이트 구축, 심지어 AI 이미지 생성까지 아우르는 거대하고 완벽한 '시각 커뮤니케이션 운영체제(OS)'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리고 2021년 팬데믹 시대.


전 세계가 문을 닫고 글로벌 원격 근무와 온라인 협업의 시대가 폭발적으로 도래하면서, 클라우드 협업에 완벽하게 최적화되어 있던 캔바의 기업 가치는 마침내 400억 달러(약 53조 원)라는 경이롭고 아득한 마천루를 세워버렸다.


전 세계 수만 개의 비상장 테크 기업 중 가장 파괴적인 영향력을 가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위대한 '데카콘(Decacorn, 기업가치 100억 달러 이상)'으로 당당히 우뚝 선 숨 막히게 벅찬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니, 완벽하다는 단어로도 부족했다.


이제는 부부가 되어버린 멜라니와 클리브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로 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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