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3년

(3화) 글로벌 금융결제 인프라 Airwallex 스토리

by 똘똘이스머펫

텐센트와 세쿼이아 캐피탈 차이나 등 거물급 투자자들로부터 1,300만 달러(약 170억 원)라는 막대한 시리즈 A(초기 대규모 기관 투자) 자금을 거머쥔 창업자의 기분을 상상해 보았는가? 이제 에어월렉스에는 잭 장(Jack Zhang), 루시 류(Lucy Liu)를 비롯한 핵심 인재에 더해 강력한 자본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진 투자자까지 붙었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에게 이런 순간은 “출발선에서 이미 앞서 나간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인 스타트업이었다면 이 막대한 실탄을 바탕으로 화려한 마케팅을 쏟아내고, 세간의 이목을 끄는 소비자용 앱을 출시하거나, “금융을 바꾸겠다”로 주요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것이다. 스타트업 컨퍼런스에서 창업자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투자자들은 그 옆에서 미소를 짓는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런 장면이 거의 하나의 공식처럼 반복된다.


그러나 에어월렉스 창업팀이 선택한 길은 완전히 달랐다. 구시대 은행들이 쳐놓은 낡은 결제망을 우회하는 세상에 없던 완벽한 금융 운영 체제를 만들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세상의 눈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길을 택했다. 화려한 발표 대신 침묵을, 시장의 관심 대신 고립을 선택한 것이다. 이른바 철저한 ‘스텔스 모드(Stealth Mode, 외부에 정체를 숨기고 개발에만 몰두하는 상태)’로의 진입이었다.


2015년 말부터 2018년까지 약 3년에 가까운 기나긴 시간 동안, 에어월렉스는 겉으로 드러나는 제품이나 웹사이트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회사였다. 대중은 물론이고, 실리콘밸리의 벤처 투자자들조차 이들이 훗날 거대한 유니콘이 되기 전까지 도대체 골방에 틀어박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일부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이 회사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맞느냐”는 농담이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침묵의 시간 동안, 회사 내부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쁜 프론트엔드(사용자 화면)를 꾸미는 대신, 가장 어둡고 복잡하며 뚫기 어려운 금융의 백엔드(데이터가 처리되는 보이지 않는 심층 시스템) 인프라를 바닥부터 구축하는 데 회사의 모든 역량과 자본을 쏟아부었다. 세상이 점점 디지털화되고 국경의 의미가 옅어짐에 따라, 쇼피파이(Shopify)를 이용하는 글로벌 이커머스나 온라인 교육 플랫폼처럼 태생부터 온라인(Born-online)인 기업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이 기업들은 태생부터 여러 나라의 고객을 상대하고, 여러 통화로 결제받고, 여러 국가의 공급망에 돈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운영 방식은 21세기인데, 돈이 오가는 길은 여전히 20세기였다.


이 거대한 기업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마트폰에 깔리는 단순한 송금 앱이 아니었다. 기업의 심장부인 ERP(기업 내 자원 관리 시스템)나 결제 화면 뒷단에 직접 코드로 꽂아 넣어, 환전과 송금을 자동화할 수 있는 API(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 기반의 엔터프라이즈 솔루션이었다. 직원이 매번 은행 사이트에 로그인해 송금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결제와 정산이 발생하는 순간 시스템이 알아서 환전하고 송금하고 장부에 반영해 주는 구조. 회사의 금융이 ‘사람의 손’에서 ‘코드’로 넘어가는 전환이었다.


기반 시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지탱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은 아스팔트 아래에 깔린 철근을 보지 못한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은 바다 밑에 깔린 해저 케이블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계를 움직인다. 에어월렉스는 수십 개의 중개 은행을 거쳐야 했던 낡은 스위프트(SWIFT) 망을 대체하기 위해, 독자적인 외환 라우팅 엔진, 1000분의 1초 단위로 움직이는 실시간 환율 계산 알고리즘, 그리고 수십 개국 통화의 장부를 한 번에 기록하고 대조하는 다중 통화 원장 시스템을 암반 위에 새기듯 묵묵히 코딩해 나갔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은 단지 “기능”이 아니라 “규모가 커질수록 더 강해지는 구조”를 의미했다. 한번 깔아 놓으면, 고객이 늘어날수록 비용이 줄고 속도가 빨라지는 전형적인 인프라 비즈니스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컴퓨터 언어로 짜인 코드보다 더 끔찍하고 거대한 장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글로벌 규제라는 이름의 뚫을 수 없는 괴물이었다.


자본이 국경을 합법적으로 넘나들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코드가 아무리 완벽해도 소용없었다. 각 국가마다 거미줄처럼 쳐놓은 까다로운 금융 규제 기관들의 법적 심사를 모두 통과해 정식 라이선스(허가증)를 따내야만 했다. 금융 서비스는 본질적으로 신뢰 산업이고, 국경을 넘는 순간 그 신뢰는 국가의 법과 제도에 의해 강제된다. 결국 이 싸움은 기술의 싸움이 아니라, 기술이 합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틀을 확보하는 싸움이었다. 루시 류는 훗날 회고록에서 “초기 창업 당시 우리는 컴플라이언스(법적 규제 준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품이 실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고 고백했다. 특히 에어월렉스의 본진인 호주에서의 허가 취득 과정은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들은 호주 증권투자위원회(ASIC)로부터 금융 서비스 라이선스를 획득해야 했고, 무엇보다 호주 건전성 규제청(APRA)이 관리하는 구매결제수단(PPF) 규제의 늪을 건너야 했다.


에어월렉스는 고객의 예치금으로 대출 이자 놀이를 하는 전통적 은행이 아니었다. 고객의 돈은 오직 송금과 결제를 위해 시스템에 잠시 머무를 뿐이었다. 따라서 에어월렉스는 고객의 자산을 회사의 운영 자금과 완벽히 분리하여, 회사가 파산하더라도 100% 안전하게 반환되는 독립적인 신탁 계좌에 보관했다. 이 구조는 전통 은행의 위험과는 다른 종류의 리스크를 다루는 방식이었고, 에어월렉스는 그 점을 수없이 설명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 머물러 있던 호주의 낡은 관료주의는 이 신탁 시스템의 안전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는 은행 보증을 이중으로 요구했고, 설상가상으로 시스템에 머무는 고객 자산의 5%를 무조건 회사의 자본금으로 쌓아두라는 가혹한 규정을 들이밀었다. 다른 선진 금융 국가들에 비하면 이는 성장을 스스로 포기하라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고객의 결제 잔고가 1,000만 달러를 넘어서는 순간 회사의 피 같은 자본이 족쇄처럼 묶여버리는 끔찍한 구조였다. 성장할수록 숨이 막히는 구조. 스타트업에게 최악의 역설이었다.


성장을 갈망하는 디지털의 속도와, 이를 무식하게 옭아매는 관료제의 무게. 이 숨 막히는 모순 속에서 잭 장과 루시 류를 비롯한 창업팀은 낮에는 백엔드 코드를 짜고, 밤에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재무 보고서와 법률 문서를 작성하며 금융 당국과 피 튀기는 줄다리기를 했다. 숫자 한 줄, 문장 한 줄이 허가 여부를 가를 수 있었다. 잘못 쓰인 표현 하나가 몇 달의 시간을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초기 벤처 캐피탈들이 요구한 엄격한 재무 실사(투자 전 기업의 상태를 정밀하게 조사하는 과정)는 이들을 강제로 프로페셔널하게 단련시켰다. 이들은 지독한 컴플라이언스 과정을 견뎌내며 완벽한 기업 지배구조를 세웠고, 호주를 시작으로 영국(FCA), 홍콩(SFC), 싱가포르(MAS) 등 주요 금융 거점 국가들의 라이선스를 하나씩 도장 깨기 하듯 악착같이 획득해 나갔다. 그 과정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회사의 신뢰를 구축하는 공사였다. 금융 인프라는 결국 “기술 + 제도 + 신뢰”가 동시에 맞물릴 때만 성립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뼈저리게 배웠다.


매출 0원의 암흑기. 그러나 이 3년의 뼈를 깎는 침묵 속에서,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촘촘하며 합법적인 글로벌 금융 운영 체제의 뼈대를 완성해 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백엔드 인프라가 마침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전 세계 주요 대륙의 라이선스 규제망이 하나의 핏줄로 연결될 무렵.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제 그들은 “기술만 있는 스타트업”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돈이 흐를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낸 팀이 되어 있었다.

글로벌 결제 시장을 집어삼키고 있던 포식자, 실리콘밸리의 거인 스트라이프(Stripe)였다. 스트라이프의 창업자 패트릭 콜리슨(Patrick Collison)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자사의 영토를 공격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에어월렉스의 가치를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가 본 것은 ‘앱’이 아니었다. 3년간의 침묵이 만들어낸 라이선스 망과, 그 뒤에 숨은 시간의 가치였다.


2018년 어느 날. 스트라이프가 에어월렉스의 창업자들에게 전격적인 인수(Acquisition)를 제안했다. 그들이 제시한 금액은 무려 12억 달러(약 1조 6천억 원)였다.

당시 에어월렉스는 3년의 긴 스텔스 개발을 막 마치고 상용화를 준비하던 시점으로, 연간 발생하는 매출액이 고작 200만 달러 남짓에 불과했다. 스트라이프의 제안은 무려 매출의 600배(600x Multiple)에 달하는, 벤처 역사상 전무후무한 미친 평가액이었다. 단순히 돈의 크기가 아니라, “시간을 돈으로 바꿔 산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실리콘밸리의 전설적인 투자자이자 세쿼이아 캐피탈의 파트너인 마이클 모리츠(Michael Moritz)마저 창업자들에게 당장 이 제안에 서명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재무적인 상식과 계산기만 두드려본다면, 이 엄청난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지구상에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 서명하면 모든 리스크는 사라지고, 모든 불확실성은 확실한 부로 전환된다.


스트라이프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들은 에어월렉스의 코드나 제품 자체가 탐났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진짜 원했던 것은 에어월렉스가 3년 동안 피와 땀을 흘려가며 각국 금융 당국과 싸워 얻어낸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규제 라이선스 망이었다. 12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거액을 지불하고서라도 에어월렉스를 통째로 집어삼킨다면, 스트라이프는 아시아 진출 시 겪어야 할 최소 3년간의 치명적인 규제 획득 지옥을 단숨에 건너뛸 수 있었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것.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인수하는 가장 잔인하고도 효율적인 이유다.


창업자들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왓츠앱(WhatsApp) 단체 채팅방이 열렸다.

도장을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 거대한 액수 앞에서는 아무리 굳은 신념을 가진 자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12억 달러. 도장을 찍는 순간, 레몬 공장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일했던 칭다오의 소년과 상하이에서 날아온 20대의 금융인은 남은 평생을 사치스럽게 살고도 남을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가 될 수 있었다. 평생의 고생을 한 번에 보상받는 가장 완벽하고 달콤한 엑시트(Exit, 투자금 회수)였다. 무엇보다 이것은 “정상적인 성공”의 형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끝낸다. 아니, 끝내는 것이 합리적이다. 창업자들의 왓츠앱 투표 결과는 만장일치였다.


그들은 거절했다.

단호하고, 완전한 거절이었다.

그들에게 자본은 목적이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단이었다. 그들은 세계 금융의 낡은 혈관을 새로운 API로 완전히 교체하는 중이었다. 12억 달러라는 액수가 평범한 이들에게는 천문학적일지 몰라도, 그들이 3년간 암흑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으로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글로벌 인프라의 진짜 잠재 가치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헐값에 불과했다.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길이 이제 막 열리려는 순간, 그 길의 소유권을 넘길 수 없었다.

루시 류가 100만 달러를 실존적으로 베팅하며 꿈꿨던 핀테크 기업들의 아마존(AWS)이라는 원대한 비전은, 고작 다른 실리콘밸리 거대 기업의 아시아 진출을 위한 부속품으로 넘겨주기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만들고자 한 것은 “잘 작동하는 제품”이 아니라, “세상이 의존하게 될 인프라”였다.

그들은 달콤한 악마의 유혹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다시 심연의 서버실과 라이선스 확보 작업으로 묵묵히 돌아갔다. 남의 제국의 식민지가 되는 대신, 자신들만의 제국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곳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가 아니라, 다시는 누구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규제 문서와 보이지 않는 코드의 세계였다.


그리고 2018년 중순. 마침내 3년의 길고 길었던 스텔스 모드의 봉인이 해제되었다. 철의 새장을 부수고 창공으로 날아오른 에어월렉스의 API가 상용화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그들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폭발력을 전 세계 금융 시장에 뿜어내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 깔아 둔 길은, 한번 열리면 빠르게 트래픽을 끌어모은다. 기반 시설이 그렇다.

무중력 상태의 폭발적 성장, 그리고 호주 역사상 가장 빠른 유니콘(Unicorn)의 탄생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4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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