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 아닌 저항

편파적이지만 편파라고 생각 안 합니다.

by 해파리

"자식들은 어쩔 수 없는 거 같아. 어린 시절이든 성인이 되어서든 정서적인 지지와 무조건적인 사랑을 부모에게 받지 못하면 저항감이 생기거든. 반항이 아니라 저항이야. 밀어내는 거지. 살면서 생각이 바뀌기도 하지만, 나처럼 아예 등지고 사는 일도 흔치 않지만 있는 것처럼. "



친구의 이 댓글을 읽고서 "반항 아닌 저항"이란 표현에 직감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내가 공감하는 이 직감은 어디에서 왔을까ㅡ 생각해 보았다.


동생은 본인의 생일즈음인 여름부터 지금까지 엄마와 냉전 중이다. 이런 시즌에는 마치 부부싸움에 낀 아이처럼, 서로 필요한 말들을 나를 통해 묻고 전달하는데 아주 미칠 노릇이다.


사실 간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생의 울분이 엄마에게는 반항으로 해석되고 동생은 저항이라 외치기에, 나는 그렇게나 먼 외국어를 통역하기엔 나는 참으로 미약하다.



gpt가 정리한 반항과 저항의 차이는 이러하다.



반항, 反(돌이킬 반) : 거스르다, 뒤집다, 뒤돌아 서다

-> 감정적·개인적 성향이 강함. 체계적 목적보다는 “거부” 그 자체가 중심


저항, 抵(막을 저) : 맞서서 막다

-> 체계적, 목적 지향적. 외부 힘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의미. 감정보다 상황·구조에 반응하는 힘.





gpt의 해석으로는, 내가 보기에도 동생의 표출은 저항에 가깝다.


왜 그러냐고? 너는 애를 낳아보지 않아서 편파적인 것 아니냐고?


그러하다. 나는 애를 낳아보지 않아, 부모가 되어본 적 없고 자식으로 산 경력만 30년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동생과 함께 정서적으로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쪽에 더 감정이입이 되는 것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것만이 '저항'의 근거는 아니다. 동생은 엄마를 사랑한다.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 엄마에게 가족 상담까지 받자고 했을 정도로. 그러니 '목적 지향적'이며, 나름의 체계도 있는 셈이다.


동생의 발악은 이런 마음에서 나왔다. "그동안 내가 참아왔는데도, 당신은 바뀌지 않았잖아." 이를테면, 한번 고쳐보겠다 단단히 마음먹은 것. 그러나 동생의 저항이 합목적적이냐 하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동생이 보는 현실은 일부, 꽤 많이 왜곡되어있다.


동생의 우울병이 깊어질 때, 세상 살기가 힘에 부칠 때, 부서지기 직전인 것처럼 느껴질 때에는 '바뀌지 않은 것'이 그녀에게 더 크게 보이는 것 같다. 내가 그렇듯이.



엄마나 아빠가 지금 문제가 없는 사람이냐 하면, 그 역시 아니다. '여전히 그대로'인 부분도 분명 있다. 그러나 동생과 나 둘 다 안다. 사람은 바뀌지만, 변화는 너무나 지난한 과정을 통해, 오랜 시간을 들여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그걸 감안하고 본다면 우린 '벌써 여기까지' 온 것으로 나는 본다.


또한 엄마는 회피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동생도 마찬가지다. 그니까, 내내 냉랭하다 한 번의 비수를 꽂는다고 해서 먹혀들어가는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자식은 부모를 짝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엄마 밥을 먹으면서도 엄마를 그리워하는 사람이고, 죽을 때까지 그러할 테지. 그래서 나는 엄마보다 먼저 사라지고 싶었다. 평생 엄마 뒷모습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엄마가 나보다 먼저 없어지는 건 정말 나한테 못할 짓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완벽하게 사라지기를, 아무런 기록도 유서도 없이. 내 장례식도 하지 말아라ㅡ. 동생에게 단단히 일러두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동생을 위해 항변하고 싶은 것이다. 내겐 편파적인 게 편파적인 것이 아니다. 동생 역시 나만큼 엄마를 짝사랑하는 동지이자 라이벌이기에, 나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안다. 그녀가 얼마나 허덕이는지. 너무나 알기에 그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피하고 싶기도 하다. 엄마는 세 명의 짝사랑을 받고 있는데, 세 명 모두 굶주린다. 그러니까, 나 하나쯤 동생에게 편파적이

어진다고 해서 불공정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식이 엄마에게 주는 절대적인 사랑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깊은 우애인들. 그 목마름을 채워줄 수는 없지 않은가.



지난주 함께 다녀온 전시회에 동생은 그 입장티켓을 사무실에 붙여놓을 만큼 만족했지만, 나는 안다. 내가 아닌 엄마와 다녀왔다면, 그녀는 더 바랄 것 없이 기뻐했을 것을. 그것을 알기에 더욱더 동생이 가자고 할 때 시간을 내어본다.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그녀가 좋아하는 메뉴를 먹으러 나서본다. 목마른 자애 대신, 소금물 같은 우애라도 그녀의 목을 적셔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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