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만 미약한 다정에 대하여

by 해파리

나는 스스로 꽤나 다정한 편이라고 자부한다.

어렸을 적부터 가정, 학교, 또래 사이에서 이해받지 못한 경험이 많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밉다 등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스레드에서 읽은

"다정한 사람은 ‘이해받지 못한 경험’을 ‘이해하는 힘’으로 바꾼 사람이다."

라는 문장에 깊이 공감한다.


다정함이란 내게 한 번 더 마음을 내어주는 행위였다.

상대가 내게 가졌던 호의가 뿌옇게 흐려져도,

눈을 비비며 한번 더 이해해 보려는 시도 같은 것.


내 안에서 다정함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 순간에는 항상 타인이 있었다.


중학생 때 나를 따돌린 가해자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때엔

나만큼 어렸던 그들의 미숙함을 이해했고


"넌 우울증 아냐. 핑계 대는 거야."라는 엄마의 말에도

바락바락 대들긴 했지만 진심으로 미워하진 않았다.

딸이 정신적으로 무너진 사람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 충분히 와닿았으니.


내가 가족 때문에 처절히 바닥을 기었을 때,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의 룸메이트는 웃으며

"내가 너희 집에서 태어났다면 더 잘 되었을 텐데"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결핍이 먼저 보였기에

이때다 냉큼 미워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와는 모종의 이유로 결별했고, 다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미움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나는 평범하디 평범한 인간.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경우엔 겨우 한두 번인 듯하다.

내게 온 무례를 매번 이해시키는 일은 지금의 나는 할 수 없다.

그 정도로 내 마음의 힘은 크지 않다.

번번이 다정함은 존재와 함께 그 미약함도 확인시켜준다.


기꺼이 약하게 보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약하게 보이는 일은 여러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다정함을 활짝 펼쳐 보이는 것이기에.

그 용기를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다.


나란 사람의 지금은. 나의 다정함이란 존재하지만 그토록 미약하다.


하지만 뭐, 한 친구에게 보냈던 메시지처럼

나는 미약한 사람들끼리 나누는 위로와 애정이 좋다.


그리고

너무나 미약한 나머지 위로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언젠가는, 하고 훗날의 단단함을 기약하면서도

아직은 이 어린 자들의 흔들림에 기꺼이 같이 휩쓸리며, 그럼에도 반성하고 다짐하며 살아가고 싶다.


만일 애초부터 제법 견고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 위로들이 나를 감쌀 수는 있어도

내 일부가 되진 못했으리라.


이제 나의 다정함에

'나'의 독사진을 넣어볼까.


최근 내게 상처를 준 두 사람에게

불편하다, 정당하지 않다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일부러 찌른 건 아니었을 거라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다정함은 나를 소외시키고자 만들어낸 자리가 아니다.

어쩌면 나의 자리를 마련해 줄 때,

미약하던 다정함은 힘이 세질지도 모르겠다.



미약하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시대라지만,

나는 그 미약함으로부터 시작되는 다정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마음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