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온의 나를 껴안는 글쓰기_3
질문 : 천재지변은 공든 탑도 무너뜨립니다. 하지만 시간과 마음을 많이 쏟은 것일수록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때로는 그 노력과 결과를 어깨에 지고, 마음에 품고 떠나기도 하는 것 같고요. 내 삶의 천재지변에 대한 이야기를 써주겠어요?
나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사회복지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대학교에서의 본 전공은 경영학과이기 때문에 입학 전 사회복지학에 대한 공부 과정이 필요했다. 입학하기 전의 나의 마음가짐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 학자의 길을 밟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나의 마음과 그때의 마음상태를 형성한 우리 가족의 역동에 관심이 많았다. 역가정인 우리 가족에 대해서, 특히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에 대해서 궁금했다. 미국의 AA(Alcohol Anonymous) 자조모임처럼 우리나라의 AA 자조 모임도 활발해졌으면 했는데, 특히 당사자 가족으로서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마치 사명과도 같은 마음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꿈꾸는 길이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고,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학기가 끝나고 생각했다. ‘아, 나는 학자의 길은 안 되겠군.’하고. 복잡한 여러 상황들, 이를 테면 현실적으로 유학을 가는 것에 대한 제약, 학자로서의 재능, 입학한 학교에 관련 지도 교수가 없다는 것 등이 있었지만, 가장 핵심에는 내가 호기심을 가진 그 분야가 그저 ‘내가 좋아하고, 관심 가는 일’이라기보다는 마치 주어진 운명처럼, 내가 사명처럼 해야만 하는, 혹은 해내면 나의 삶의 의미가 딱딱 들어맞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알아챈 것에 있었다.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미국 박사 대학원 입학심사에서, ‘알코올 중독 가정에서 올바르게 자라난 한국인 당사자 자녀, 이제는 중독이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통감하며 미국의 중독 해방 과정을 공부해 사회복지적으로 한국에 도입하려 하다’ 혹은 나아가 한국에 돌아올 때도 ‘각종 중독에 대한 사회복지적 관점의 접근, 요즘 연구의 트렌드인 당사자 접근을 활용하여 연구하고 가르치다’라고 하면 멋질 것 같았다. 이렇게 소개되면, 나의 힘들었던 가정환경이 용서될 것만 같았다.
1학기 후 대학원 생활은 재정적으로도, 학업적으로도, 건강, 가족 문제에 있어서도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대학원을 그만두지 않았다. 시작을 했기에, 끝맺음도 잘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3년 반 만에 대학원을 마치게 되었고, 내 이름이 새겨진 첫 책과 졸업장을 거머쥐게 되었다. 지도교수님의 지도가 거의 부재했기에, 처음으로 쓰는 사회과학 논문은 정말 어려웠다. 꾸준히, 성실하게 연구실에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이 걸려 논문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시간과 마음을 쓴, 사회복지학 분야에서 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3년의 시간은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고, 결과물을 작게나마 ‘졸업논문’으로 받아 들었지만, 나는 그 모든 경험을 나의 것으로 그저 내 안에 두고, 그 분야를 떠나기로 했다. 나의 대기업 퇴사 선언에도 놀랐던 주위 사람들은, 유학의 길도, 사회복지학의 길도 걷지 않으려는 나의 선택을 잠잠히 바라보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 길을 걷지 않고자 하는 용기, 사회복지학 공부를 통해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청소년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 결국은 그때의 아온을 구해내고 싶은 마음,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는 깨달음에 이른 것, 모두 내 안에서 일어난 변화와 선택, 역동이었다.
멀리서 내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니, 이 사람 꽤나 단단한 사람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