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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윤 Sep 06. 2023

너무 무르지 않은 사람

초등학생의 이상형

집을 떠나오기 전. 내 방 정리를 하다가 초등학생 때 단짝친구와 썼던 교환일기를 발견했다. 내용을 보자 하니 마음을 잘 안 열었던 내가 그 단짝친구에게는 뭐든 솔직히 이야기했던 모양이다.

그중 친구가 자기 이상형을 적으면서 내게 물었다.

 '넌 이상형이 뭐야?'

외모 부분은 무난했는데 성격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사회적응도 빠르고 너무 무르지 않음(너무 착하지 않으면) 좋겠어. 이기적이지도 않고 돈을 잘 벌면 좋겠어'

나는 안다. 내가 왜 저런 이상형을 적었는지. 하지만 내가 충격이었던 것은 내가 저런 생각을 무려 12살 때부터 가졌다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착하다 못해 호구였다. 물론 집 밖에서의 얘기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한다는 말이 장사는 손해 보면서 하는 거란다. 물론, 적자를 감안하면서 공격적인 투자와 마케팅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회수와 흑자전환을 바라보고 하는 일 아닌가? 아버지는 실제로 손해 보면서 사업을 했다. 뭔 일을 벌이는지는 말을 안 해주니 알 길은 없었지만. 할머니가 가정부일로 벌어온 돈도 엄마가 전문직이라 꽤 많이 벌어온 돈도 어디 갔는지 임대아파트에 살면서도 집에 항상 현금이 없었으니 전부 그 알 수 없는 사업 속으로 손해 보며 사라졌으리라. 말을 안 해주는데 현금이 없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고등학생이 용돈 모은 걸 빌려갔다. 할머니가 학자금대출하고 있다니까 부모님 절대 주지 말고 대학등록금하라며 내게 직접 주신 300만 원도 가져가버렸다. 회사생활해 보니 300만 원. 그게 없을 돈인가 싶다. 영끌로 집을 매매한 것도 아니고... 좋은 대학을 나와서 엄마는 전문직이었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밖에서만 착한 사람이었다. 쌩판 모르는 남들도 본인이 알아서 배려해 주고 양보해 줬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집에서 같이 사는 가족들에겐 가족들이 말해도 안 해주는 배려와 양보였다.

무의식 중에 안 것 같다. 아버지는 사회부적응자였다. 다음날 사업과 관련된 약속이 있는데도 새벽까지 과자 먹으며 TV 보며 자다가 늦잠을 자서 전화에 대고 연신 죄송하다고 읊어대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린아이는 안 것이다. 호구처럼 잘 사는 친구들 뱁새가 황새 따라잡겠다고 하는 행동들을 보면서 아이는 사회적응자를 만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냥 착한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 불이익을 당해도 말도 못 하고 영업사원들에게는 그냥 호구였다. 필요도 없는 것을 영업사원에게 넘어가서 중복되는 물건들을 또 들여놓고는 했다. 그리고는 돈이 아까우니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 모습을 보면 복장이 터졌다.


'착하지 않은 것과 이기적이지 않은 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바로 아이의 아버지와 반대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생각했던 것이었다. 집 밖에서 남들에겐 너무 착하지 않은 사람이면 좋겠고 가족들에겐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아이의 바람이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나의 이상형과 결혼했다. 남편은 사회성도 좋고 회사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우선순위는 가족이다. 아내와 아들이 항상 먼저이며 아내와 아들을 항상 먼저 배려한다. 친구들이나 남들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뒷순위이다 못해 저 구석에 있는 느낌이다. 남편은 가난한 집에 자라서 짠돌이다. 심각한 짠돌이는 아닌데 남들에게 먼저 베푸는 법이 잘 없다. 나도 물론 그렇다. 호구 같은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짠순이가 되었다. 어머니처럼 호구같이 살지도 않겠노라 생각했으리라.


겨우 초등학생이 할법한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일찍 철이 들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일찍이라 놀라긴 했지만.


그러면서 우리 아이는 또 다르기를 바란다. 가족도 잘 배려하면서 남들에게도 베푸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남편도 나도 삶이 팍팍했기에 베풀 줄을 모르지만 우리의 아이는 쉽게 베푸는 삶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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