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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결 Apr 10. 2023

사과 그리고 양심의 자유

ㅤ근래 유사한 사건에 대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내놓은 판단은 양심의 자유란 무엇인가에 관한 깊은 철학적 고민을 자아낸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이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설령 헌법 제19조가 명시적으로 “양심의 자유”라는 언급을 하지 않더라도 민주적 법치국가의 법질서 근간을 이루는 인간의 존엄성 원칙에 비추어 우리 헌법에서 양심의 자유는 당연히 도출될 것이다. 국제법상으로도 한국이 채택한 자유권규약(이른바 B규약) 제18조 제1항은 “모든 사람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여 양심의 자유를 보편적 인권으로 보고 있다.

ㅤ헌법재판소는 헌법 제19조에서 말하는 양심에는 세계관, 인생관, 주의, 신조 등은 물론이고 이에 이르지 않아도 널리 개인의 인격형성에 관계되는 내심에 있어서의 가치적 윤리적 판단도 포함되며, 양심의 자유는 널리 사물의 시시비비나 선악과 같은 윤리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내심적 자유와 더불어 이와 같은 윤리적 판단을 국가권력에 의해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받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한다고 판시하고 있다.*1) 다만, 헌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이지,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양심은 아니라고 본다.*2) 따라서 가령 정부가 자동차 운전자에게 안전띠 착용을 법률적으로 강제한다고 해서 헌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양심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3)

ㅤ최근 대법원은 교원이 중학교 학생에게 법령상 명문의 규정 없는 징계처분을 내린 사건에서 그러한 징계의 효력이 긍정되기 위해서는 법령과 학칙에 대한 엄격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놓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문제시된 징계처분이 교사에 대한 “사과편지”를 작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대법원은 학생의 본심에 반하여 사죄의 의사표시를 강제하는 사과편지 작성이 언제나 그 작성자의 심성에 유익할 것이라거나 교육의 목적에 부합할 것이라고 추단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4) 또한,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언급을 덧붙였는데, 학교폭력예방법 제17조 제1항 제1호가 “피해학생에 대한 서면사과”를 규정한 것과 학칙 중 “학교 내 봉사”에 “사과편지 작성”이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서로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 같은 법률조항을 근거로 교사에 대한 사과편지 작성을 지시한 징계처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부연했다.

ㅤ그렇다면 학교폭력예방법 제17조 소정의 “피해학생에 대한 서면사과”는 ― 비록 교사에 대한 사과편지를 작성하도록 명하는 징계처분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하더라도 ―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최근 헌법재판소는 결정을 내렸다.*5) 이 결정에 따르면 학교폭력예방법에 의한 서면사과는 목적이 정당하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능 역시 적절하므로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즉,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피해자에 대한 서면사과를 요구하는 법률은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ㅤ이 결정은 헌법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른바 사죄광고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여 위헌이라는 종래의 결정과 대치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사죄광고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이 그것을 사죄하는 의미로 신문이나 방송에 사과문을 게재하는 것을 뜻한다. 민법 제764조는 법원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 대해 피해자의 청구에 의하여 손해배상에 갈음하거나 손해배상과 함께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에서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에 “사죄광고”가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한 바 있다.*6) 정리하자면, 헌법재판소는 사죄광고나 사과문 게재를 명하는 법률조항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인정해왔지만, 최근 결정에서는 마치 그것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ㅤ그러나 나는 본격적으로 이 사안을 다루기에 앞서 헌법재판소가 사실상 양심의 자유에 대한 판단을 뒤집었다는 의심이 설익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혹은 그러한 의심을 기우(杞憂)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헌법재판소가 학교폭력예방법의 서면사과 조항이 양심의 자유에 반하지 않는다고 결정한 것은 서면사과가 특별하다는 점에, 다시 말해 가해자를 선도하고 피해자의 피해 회복과 그들 간의 정상적인 교우관계 회복을 위한 “특별한 교육적 조치”라는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즉, 서면사과는 온전히 응보적 관점에서만 접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7) 반면에 과거 민법상 명예회복을 위한 처분에 관한 결정에서는 사죄광고가 온전히 응보를 통해 피해자에게 주관적인 만족을 주려는 목적으로 고안되었다는, 곧 보복감정의 만족에 중점을 둔 전근대적 제도라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는 강제로 사과하게끔 하는 조치가 앙갚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가해자의 교화를 위한 것인지다. 이는 형사정책학의 용어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응보주의에 반대하여 특별예방주의를 인정하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ㅤ누군가는 이러한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이 도대체 무슨 차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아마도 사죄광고든 서면사과든 본질적으로 똑같은 제도이며, 헌법재판소가 같은 제도에 대해 다른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양자는 서로 많은 부분에서 닮았을뿐더러 그 차이점은 초록이냐 동색이냐에 불과할 정도로 작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분석에 따라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 헌법재판소가 과거의 판단을 바꾸었다고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전술했듯이 헌법재판소는 양자에 차이가 있다는 의견이고, 정말 그런 차이가 있는지는 검토해야 할 또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비판할 지점은 헌법재판소가 양심의 자유를 내던졌다는 것이 아니라 “명예훼손에 관한 사죄광고는 위헌이지만, 학교폭력에 관한 서면사과는 합헌이다”라는 취지로 모순된 주장을 펼친다는 것에 있다.

ㅤ이제 사안을 살펴보자.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피해자에 대한 서면사과를 강제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확실히 학교폭력예방법은 교육장이 심의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피해학생의 보호와 가해학생의 선도ㆍ교육을 위하여” 피해학생에 대한 서면사과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달리 과거 위헌결정을 받은 민법조항은 명예훼손 사건에서 법원이 “손해배상에 갈음하거나 손해배상과 함께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두 개의 법은 유사한 수단을 사용하지만,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단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수단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독자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곧, 법률가들이 흔히 말하는 비례원칙 가운데 수단의 적합성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ㅤ실제로 사죄광고와 서면사과는 양태가 다르다. 일단 사죄광고는 사과의 내용이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반면, 서면사과의 경우 그 내용을 공개해야 할 의무는 없다. 만일 그 내용을 강제로 공개하게 한다면 이는 다른 법적 문제가 될 것이다.*8) 그러나 사과 내용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게 되는지는 양심의 자유에 대한 침해의 정도를 산정할 때 결정적이라고 볼 수 없다. 사과 내용이 광포되는 것과는 별개로 양심의 자유는 사죄의 의사를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받음으로써 침해되는 것이며, 그때 받게 되는 굴욕감은 개인마다 다르므로 사과가 공개적인지는 양심이 받는 위협의 수준과 모종의 비례적 관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사과를 강요받은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사죄하는 방식과 개인적으로 사죄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때 후자를 택한다면, 그러한 선택의 까닭은 심리적인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덜하기 때문이지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정도가 약하기 때문은 아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사과하는 것을 더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는 이유에서 ― 가령 공개적인 사과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평판을 개선할 수 있다고 여기거나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든지 혹은 기왕 사과를 강요받은 마당에 떳떳하게 대응하는 것이 자기 성격과 신념에 더 부합한다든지 등등 ― 공개적인 방식을 더 선호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사죄의 의사를 당사자만 알게끔 표명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에 저촉될 것이다.

ㅤ헌법재판소가 이와 관련해서 무언가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공개적인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면 무엇이 양심을 위협하는 정도를 더 강하게 만드는가? 헌법재판소는 특별한 교육적 조치로서 내려진 서면사과를 이행하지 않더라도 그 불이행에 따른 추가적인 조치나 불이익이 없다고 말한다.*9) 이 주장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침해는 위협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논거를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사과하지 않으면 오늘 저녁밥 없다”는 것과 “사과하지 않으면 총으로 쏴버리겠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확실히 전자보다 후자가 더 위협적이고 양심의 자유를 억누르는 데 효과적이다(설령 누군가 삶보다 죽음을 더 선호해서 총에 맞는 것을 더 반기더라도 경험칙상 그런 일은 현실에서 별로 있을 법하지 않으므로 유의미한 예외라고 보기 어렵다). 헌법재판소는 양심의 자유가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윤리적 확신과 이에 반하는 외부적 법질서의 요구가 서로 회피할 수 없는 상태로 충돌할 때만 침해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10) 따라서 개인이 양심에 반하는 어떤 요구를 거부하더라도 그 불응에 수반되는 법적 불이익*11)이 없다면 양심의 자유는 침해되지 않는다.

ㅤ그러나 가해자가 서면사과 조치를 이행하지 않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의 주장은 정확하지 않다. 학교폭력예방법은 가해학생에 대한 선도가 긴급하다고 인정하면 학교의 장이 선제적으로 조치할 수 있고, 제17조 제1항 제1호의 조치 ― 곧 “피해학생에 대한 서면사과”를 포함한 이 조치를 거부하거나 회피한 가해학생을 징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12) 이는 일정한 절차에서 서면사과 조치 불이행에 따른 불이익이 부과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3) 또한, 학교의 장은 서면사과를 비롯한 제17조에 따른 조치의 이행에 협조할 법적 의무를 지는데, 비록  서면사과를 요구받은 가해자에게 피해자에 대해 사과할 법적 의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장한테 부과된 법적 의무로 말미암아 간접적으로 가해자의 서면사과를 강제하는 효과가 생긴다고 볼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학교의 장은 가해학생이 서면사과를 거부하면 교육적 조치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다른 징계처분을 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해자가 서면사과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추후 법적 분쟁에서 불리한 요소로 참작된다: 법원은 가해자에 대해 처벌을 가중하거나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서면사과 조치에 불성실하게 대응했다는 것을 근거로 삼을 수 있다.

ㅤ다른 한편, 의심스러운 점은 과연 서면사과 조치가 정녕 의도한대로 어떤 교육적 성과를 달성할 수 있는지다. 단순하게 보면 누군가에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은 지시를 받은 사람의 반항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특히 헌법재판소가 과거 결정에서 지적했듯이 사죄의 의사를 자기 양심에 반하여 외부에 표출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엄청난 굴욕감을 준다. 무엇보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이 미성년자인 초중등학교 학생에게 그의 양심에 반하는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깊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아마 학생 대다수는 그것을 화해나 반성의 기회로 생각하기보다는 징벌로 여길 것이다. 그들에게 서면사과는 친구끼리 틀어진 관계를 복원하려고 서로 편지를 수줍게 주고받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서 범죄적 행위로 인식되는 학교폭력이라는 혐의를 받는 학생이 얼핏 봐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어떤 심의위원회에 회부되어 일련의 법정절차를 거쳐 “제1호에 해당하는 조치”를 받는 일이다.

ㅤ물론 학생이 서면사과를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서면사과는 그 자체로 현재의 법적 지위나 상태를 장래에 있어 불안하게 변모시키는 불이익한 조치며, 이 같은 조치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는 명백히 학교폭력예방법과 그것을 집행하는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 가해자가 진지하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하여 피해자에게 내면의 진중함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사과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의 참된 모습이라면, 그것은 외부의 힘에 의한 강요로는 성취될 수 없다. 양심에 반하지만 강제된 사과는 그저 굴종일 뿐이며, 그것으로 정의가 실현된다는 기대는 순진한 믿음에 불과하다.


ㅤ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말을 덧붙이고 싶다. 많은 경우에 그렇듯 죄인의 인권도 선량한 사람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주장은 인기가 없다. 어쩌면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유리해 보이는 이 논변 또한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서면사과 조치로 인해 양심의 자유를 침해받는 사람은 가해자들 가운데서도 피해자에게 사과할 마음조차 없는 파렴치한 이들이다. 우리는 범죄자로부터 그가 가진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지위를 박탈하고 싶어하며 강력한 보복의 충동을 느낀다. 잔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를 극형에 처하고, 가해자를 데려다 피해자 앞에서 용서를 빌게끔 만들거나 죄인들이 영원히 고통받기를 바란다. 나 역시 그런 감정을 느낀다. 나는 개인적으로 <존 윅>이라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는 잘생긴 배우가 등장하거나 액션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살인청부를 업으로 하는 “쓰레기들”끼리 서로를 죽이려 총질하고 칼부림하는 모습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영화에서는 ― 주인공을 포함하여 ―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어느 누가 죽더라도 선량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행복한 결말이다.

ㅤ그렇지만 우리는 살인자끼리의 난투극과 같은 야만을 추구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며,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법원 경비원이 검문을 위해 방문자를 불러 세우는 것과 건달이 행인 앞을 가로막는 것을 구분하며,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하는 것과 유괴범이 아이를 납치하는 것이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경비와 경찰이 하는 행위를 정당하다고 여기며, 그 근거를 법에서 찾을 것이다. 우리는 법전과 판례집을 펼쳐서 답을 얻는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법이 어떻게 그러한 정당화를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에 관해 가장 적절해 보이는 답을 민주주의에서 구할 것이다: 법은 민주적 선거에 의해 구성된 의회에서 심의를 거쳐 다수의 동의를 얻었기에 강제되는 것이 정당화된다. 궁극적으로 그 법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지배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ㅤ그러나 그 절차는 어떤 기준을 만족하지 않으면 공정하지 않다. 공성정을 뒷받침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사람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조건 없이 선거권을 가져야 한다. 누구든 성별이나 장애, 빈부 따위를 이유로 투표하거나 심의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조건의 배후에는 하나의 원리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은 정치공동체의 최고 덕목(sovereign virtue)이다. 한 철학자가 “평등한 존중과 배려”라고 이름한 이 원리에 따르면 시민들 모두의 운명을 평등하게 배려하지 않는 정부는 정당하지 않으며, 그 덕목이 없는 정부는 독재에 불과하다.*14) 또한, 삶의 중심적 가치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책임은 개인에게 남겨져야 한다.*15) 만일 정부가 독립적인 도덕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삶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고 그의 정치ㆍ도덕ㆍ윤리 판단이나 신념에 간섭한다면, 이와 관련된 권리를 침해받은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에게 법의 이름으로 강제되는 공동체 구성원의 의지는 자치가 아닌 억압을 의미할 뿐이다.

ㅤ그러므로 양심의 자유를 비롯해서 윤리적 독립성에 핵심적인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서는 정부 ― 곧, 민주주의란 인민에 의한 지배(rule by the people)라고 정의할 때 공동의 행위자로서 우리 인민(We the people)은 범법자에게 민주적 의지를 강제할 도덕적 지위가 있음을 주장할 수 없다: 평등한 존중과 배려의 덕목을 따르지 않는 정부는 시민에게 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거나 그 의무를 유지하기 위해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이들은 민주 정부와 독재 정권을 구별하며, 사람들한테 똑같이 강압적인 힘을 사용하더라도 후자에 대해서는 폭정이라고 비난한다. 이처럼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지위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가해자를 굴복시켜 피해자 앞에 무릎 꿇게 만들고자 하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정부의 기본적인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16) 이는 가해자에 대한 경멸이 보복감정에 근거하든 아니면 응보주의보다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다른 무엇에 기초하든 상관없다.

ㅤ또한, 나는 이 문제가 교육과 관련되어있음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학생들이 다른 구성원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우받을 수 있도록 교육 환경을 개선하려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 과정은 무척 험난하고 어려웠다. 일부 정치인과 관료, 교사, 심지어 학부모는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문제의 책임을 인권으로 돌렸다. 그들은 검열과 통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폭력으로 교육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에 있어서도 자유를 신뢰해야지, 억압을 신용해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느 방향인지는 명확하다. 때때로 우익들은 인권이 몽상가와 좌파의 주술적 상징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도 북한 정권의 반인도적 폭정을 비난할 때만큼은 그것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개인의 권리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Mar 7, 2023


* 대표이미지 출처: 헌법재판소

* 이 글은 또한 나의 개인 블로그에 게시되었다. (최초발행: Mar 7, 2023)


1) 헌재 1991. 4. 01. 89헌마160, 판례집 3, 149<153>


2) 헌재 1997. 3. 27. 96헌가11, 판례집 9-1, 245<263>


3) 헌재 2003. 10. 30. 2002헌마518, 판례집 15-2하, 185<207>


4) 대법원 2022. 12. 1. 선고 2022두39185 판결, 공2023상, 207


5) 헌재 2023. 2. 23. 2019헌바93, 공보 317, 305


6) 헌재 결정(주1)


7) 공보 317, 311ff


8) 국가인권위원회는 가해학생으로 하여금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사과문을 공개적으로 낭독하게 하는 것이 당사자의 인격권을 침해한다고 결정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아동권리위원회 17진정1082700, 17진정1128000(병합)


9) 공보 317, 312


10) 헌재 2002. 4. 25. 98헌마425등, 판례집 14-1, 351<364>


11) 헌재는 여기서 법적 불이익이란 권리를 침해하는 정도에 이르지 않더라도 기존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거나 법적 상태를 악화시키는 등 적어도 현재의 법적 지위나 상태를 장래에 있어 불안하게 변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시한다. 헌재 98헌마425, 판례집 14-1, 365


12) 학교폭력예방법§17④, ⑦


13) 학교폭력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변호사들 중 일부는 학교폭력예방법 제17조 제11항에 근거하여 “서면사과 조치는 가해학생이 이를 불응하더라도 강제할 방법이 없다”는 취지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학교폭력예방법 제17조 제4항과 제7항을 별개로 취급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를 간과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거나 법률의 문언상 제4항 제1문은 “학교의 장은 가해학생에 대한 선도가 긴급하다고 인정할 경우 우선 제1항 제1호부터 제3호까지, 제5호 및 제6호의 조치를 할 수 있으며, 제5호와 제6호의 조치는 동시에 부과할 수 있다”라고, 제7항은 “학교의 장이 제4항에 따른 조치를 한 때에는 가해학생과 그 보호자에게 이를 통지하여야 하며, 가해학생이 이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때에는 학교의 장은 「초중등교육법」 제18조에 따라 징계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이와 관련하여 비슷한 논지의 견해가 있는지를 찾아보았는데, 학계 다수설은 학교폭력예방법의 서면사과 조항이 위헌이라는 것으로 보이고, 나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진 의견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승현,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의 개정 내용 및 개선 방안,” 형사정책연구 (vol.23, no.2, 2012), 176면; 배원섭ㆍ성희자, “학교폭력 가해학생의 조치에 관한 연구,” 사회과학연구 (vol.25, no.4, 2014), 277면; 김갑석, “학교폭력예방법과 예방프로그램의 운영과정에서 발생될 수 있는 인권침해에 관한 연구,” 유럽헌법연구 (no.21, 2016), 449면; 장혜진,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의 개정방향에 대한 소고,” 입법과 정책 (vol.10, no.2 2018), 371면.


14) See Ronald Dworkin. Sovereign Virtue (Harvard University, 2000)


15) Ronald Dworkin, “Equality, Democracy, and Constitution: We the People in Court,” Albera Law Review (vol.28, no.2, 1990), pp.340-342


16) Ronald Dworkin, “Foreword,” Extreme Speech and Democracy (Ivan Hare & James Weinstein eds.,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p.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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