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사랑 없는 결혼을 했다. 부부는 한 팀이 되어 무던히 살며 커리어도 잘 쌓았으며 슬하에 자녀들도 두었다. 중년이 된 남자는 뜨거운 태양과 열정이 그립고, 예술혼이 불타오른다. 그리고 그 열정을 알아본 자에 의해 류트를 알게 되고 같은 자의 소개로 개인 교습을 받게 된다. 아내는 방에서 귀걸이가 흔들릴 만큼 동요하며 숨겨둔 류트를 연주한다. 처음에는 류트를 연주하는 마지막 장면이 뜬금없게 느껴져서 오래 곱씹었고, 설마 여자가 남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이야기일까, 생각하고 일단 넘겼다.
다음 날, 추천으로 알게 된 <데미지>라는 영화를 봤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세력 있는 집안(추측) 여성과 결혼해 권력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직장, 가정에서 안정적이고 따스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의 평범하고 무난한 삶은 아들의 여자 친구 '안나'를 만나면서 바로 깨진다. 둘은 거의 동물처럼 서로를 갈구하고, 울타리 안에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모습으로 이중생활을 해 나간다. 주인공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바꾸어서까지 안나를 사랑하고자 한다.
영화를 보고 나니, <데미지>의 남자 주인공과 <류트>의 남자 주인공이 오버랩되었다. 무난한 사람과 만나 무난하게, 오히려 풍족하게 살고 있던 두 사람에게 내재되어있던 에너지가 뒤늦게 방출되는 모습이 말이다. 그러면서 '그래도 데미지 주인공에 비하면 류트 주인공은 양반이군, 그저 류트를 좋아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했다. 몇 초 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류트> 말미를 다시 읽어보았다. 완전한 나의 착각이었다. <류트> 주인공도, 만만치 않다.
" 흔한 비유로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닥치는 사건이다. 신호를 준수하고 횡단보도 정가운데로 조심스럽게 건너도 사고가 나려면 어떻게든 나지 않나. 모든 사랑은 어찌할 수 없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선택 불가. 일단 수용한 후의 감정 조절이 있을 뿐이다. 안 당하면 화평하고 무난하게 사는 것이고 당하면 폭풍이 한차례 덮치는 것이다. 몰락도 나쁘지 않다. 이런 얘길 하면 누군가는 꼭 묻는다. "네 남편이 그래도?"라고. 마음 같아선 그의 사랑을 존중해주고 싶다. 한때나마 뜨겁게 사랑했던 남자가 남편이다. 그에게, 다시는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고 전제하는 게 나로서는 더 쓸쓸하다.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서해문집, 2016
자신이 원하는 걸 추구하지 못한 채 사랑도 없이 평생을 살다 뒤늦게 열정거리를 찾은 남자와 사랑을 얻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최대한 사랑하는 사람에게 헌신하는 여자(심지어 자신에 대한 배신마저도 감내하는!). 둘 중 하나여야 한다면 어느 쪽이 나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둘 다 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 적당한 사람을 만나 적당한 때가 되어 적당한 사람과 결혼을 결심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더 두렵게 느껴진다. 나중에서야 나의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혹은, 나의 상대방이 운명의 사랑을 만났다며 헤어져달라고 눈물바람으로 내게 애원한다면? 아니면, 나를 사랑하지만 그저 한 번의 실수였다며 다른 사람을 만나고 용서를 빌면?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데미지> 주인공이 그랬듯 그가 날 속인다면? 내가 그쪽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나만 그쪽을 사랑하는 상태라면 마음이 정말 찢어질 것 같다.
또, 인생을 되돌아보면 어떨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있나? 무난한 인생, 뒤늦게 늦바람(?)이 들지 않기 위해 내가 지금 더 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 문화와 가족으로부터 은근히 받은 여러 가지 생각들 중에 나도 모르게 나를 억압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면, 삶은 무엇일까? 어차피 100여 년도 살지 못하고 가는 인생길에서 나는 어떤 기조를 택할 것인가?
'한 번 사는 인생이니 즐기자'는 YOLO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서 친구들과의 밴드 이름을 WOLO(We Only Live Once)로 바꿔둔 적이 있다. 욜로같이 살자며 반 농담처럼 지은 이름이지만, 사실 WOLO라는 뜻을 조금은 다르게 되뇌고 있다. 인생은 한 번이라는 사실은 '한 번 사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한 번 사는데 그래도 할 건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한 번 사는데 너무 망설이고 있진 않을까?'와 같이 가끔씩 내 마음을 정돈할 때 도움이 된다. 사랑 파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지만, 수많은 작품들이 사랑에 대해 회의를 들게 해도 어쩐지 막연한 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같은 시칠리아 기후를 좋아하고, 서로를 좋아하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사람, 바보 같은 기대와 희망을 안고 무거운 책임감 & 감정 조절의 무게를 기꺼이 지고 싶게 하는 사람이 내 인생에서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요양원에서 만나는 건 아닐지 걱정이긴 한데, 그게 어디람)? 더불어 나의 인생, 걷잡을 수 없는 바람이 불기 전까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고, 들어오는 일은 막지 않으며, 대신 나의 영혼을 즐겁고 살찌게 하는 활동들을 병행하면서 삶을 윤택하게 가꿔 나가고 싶다. 예를 들면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