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가장 사랑하던 에메랄드빛 호수와의 조우
밴프여행에 시간을 더 할애하고 싶어 여행 일정을 하루 당기긴 했지만, 골든의 숙소가 환불 불가였던 관계로 밴프에 하루 일찍 당도할 수가 없었다. 하루 당긴 날까지 포함 이틀을 골든에서 숙박하게 되었다.
골든에서의 두 번째 날. 조금은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그가 에메랄드 레이크 구경을 하고 돌아오자고 했다. 다행히 에메랄드레이크는 골든 숙소에서 6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하루 일찍 출발한 보람이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밴프 여행’이라고 통칭하고 보는 많은 장소들이 사실은 ‘밴프’ 다운타운에서 꽤나 많이 떨어진 곳들이라는 걸 알게 됐다.
에메랄드 레이크는 그가 그 많은 밴프의 호수 중 가장 좋아하는 호수라 했다(레이크와 호수라는 표현이 혼재할 예정임을 양해부탁드립니다). 사실 내가 가장 기대하던 호수는 재스퍼 가는 길의 파란색 호수인 ‘페이토 호수’와 그 유명한 ‘레이크 루이스’였다. 유튜브로 캐나다 영상을 보면서, 에메랄드 레이크의 원래 이름이 ‘레이크 루이스’였는데, 현재의 레이크 루이스가 더 예뻐서 이름을 빼앗긴 비운의 호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날 에메랄드 레이크에 오면서도, ‘아무래도 레이크 루이스보다는 조금 덜 예쁘겠군’, 생각했다.
금세 주차장에 도착하긴 했는데, 주차장의 존재는 저 멀리 보이지만 주차장에 차 자체가 진입할 수 없었다. 주차장 자체도 작고 이미 만차였기 때문에 차들이 눈치껏, 빨리빨리 ㄷ자 모양을 돌아 나와 떠나야 하는데, ㄷ자 가운데쯤에서 나가는 차를 기다리는 차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졸지에 움직이지 못했던 거다.
어찌어찌 그들의 차를 잘 스치고 나와 차를 주차장 반대로 돌리긴 했으나 이대로 돌아나가 집에 갈 순 없는 노릇. 주차장부터 시작된 노상 주차 행렬 중 어딘가 낄 수 없을까 계속 운전을 했다. 이러다가 아예 다른 데다 차 대게 생겼다 싶었다. 한참을 서행하다 간신히 한 군데 자리를 찾아 주차 성공. 차를 댄 곳에서 호수까지 10분 여는 걸었던 것 같다. 이것이 성수기 여행의 숙명이겠지. 주차 딱지나 안 떼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진입하자마자 보이는 에메랄드빛 강! 아름...답다고 생각할 즈음 시선을 강타하는 인파... 에메랄드 강과 뒤쪽 아름다운 산을 같이 사진에 담을 수 있는 다리 위에는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은 사람들이 빼곡했다.
어색하게 사진을 몇 개 찍고 나서, 빠르게 다리를 통과했다. 우리에게는 다리를 쭉 건너 걸어가는 오른쪽 길과, 돌아 나와 강의 왼쪽 방향으로 도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나는 왠지 오른쪽으로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오른쪽으로 가서 호수를 한 바퀴 돌자고 했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일단 나를 따라왔다.
오른쪽 다리 뒤쪽 길을 따라 통나무 숙소가 여러 채 있었다. 숙소 바로 앞이 에메랄드 레이크라니 얼마나 좋을까? 만약 나도 여기 묵을 수 있었다면 하루종일 호수만 볼 수 있었겠네. 어떻게 예약하는 걸까?
숙소를 지나오다 보니 호수가 끝내주게 아름다워 보이는 포인트가 보였다. 사진 찍는 가족을 차분하게 기다린 후…. 영상을 가로로 담고, 세로로 담고, 사진을 가로로 찍고 세로로 찍고…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난리는 다 치고 멍하니 호수를 바라봤다. 여기가 이렇게 예쁜데 레이크 루이스는 과연 얼마나 예쁠까? 의외로 지금 여기 프레임이 되게 사진이 잘 나오네!
여행 오기 전엔 저 산의 침엽수들이 낯설고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예쁘기만 하다.
사진스팟을 지나 조금 더 걷기 시작하는데, 이제 숙소들도 더 이상 없고, 그러다 보니 사람이 지나가도록 닦아둔 길도 끝이 났다. 눈앞에는 사람이 걸어가도록 되어 있지 않은 풀이 무성한 길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겁쟁이인 나한테) 위협적인 벌도 조금씩 보이고. 그는 이제 그만 반대로 돌아가자고 했고, 나는 이 호수를 한 바퀴 삥 돌면 얼마나 예쁠까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멈춰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강 바로 앞이 침엽수가 가득했기 때문에 걸어봤자 호수도 얼마 못 봤을 텐데 싶은데, 그때는 뭘 몰라서 그랬다.
이윽고 반대편 숲 속에서 두 명의 커플이 나무숲과 풀더미를 헤치고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여기 쭉 가도 길이 있냐고 묻자, 그들도 잘 모르겠다고, 그들도 조금 가 봤다가 아닌 것 같아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럴 줄 알았다, 는 그의 차가운 눈빛.
그 후에 우리와 반대편으로 한 바퀴를 삥 돌아서 우리 쪽까지 돌아온 사람들도 만났지만, 내 생각보다 호수 한 바퀴를 돈 감상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와 나는 반대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길이 없는 데를 왜 가려고 하냐고 그가 툴툴거렸고 나는 어차피 풀숲길을 가지도 않고 섰다가 돌아왔으면서 뭐 난리냐고 받아쳤다.
세상 아름다운 호수에서 그렇게 두 사람이 토라진채 걷고 있었다.
다시 처음에 왔던 다리로 돌아왔다. 이번엔 다리 왼쪽 길을 걸었다. 아까 걸었던 오른쪽 길은 호수를 조망만 할 수 있고 물가 가까이는 갈 수 없게 되어있었는데 반해, 왼쪽 길 초입에는 호수를 가까이 보고 만지고 또 앉을 수 있는 말 그대로 호숫가가 있었다. 그리고 쭉 가면 산책 내지는 트래킹을 할 수 있는 코스도 있었다.
우리는 그다지 하하 호호 트래킹을 할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이대로 또 이곳을 떠나기는 아까우므로 한 호숫가 옆에 앉아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았다. 빈정은 상했지만, 풍경은 참 아름다웠다. 세상 성의 있게 사진과 영상을 열심히 남겼다.
호수 색깔부터 범상치 않아 여기에는 설마 사람들이 물에 안 들어가겠지, 했는데. 여기도 역시 몇 명이 물속에서 신나게 수영하고 있었다. 그들의 물 사랑은 못 말려!!
가까이에서 본 호수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본 호수의 색보다는 조금 더 차분하고 짙은 색을 띠었다. 같은 호수임에도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어디서 바라보냐에 따라서도 많이 다르고 해가 쨍쨍하게 비치냐 아니냐에 따라서도 많이 다르구나. 같은 호수를 보고 온 사람들 사이에서도 몇 시에 왔는지, 몇 월에 왔는지, 어떤 날씨에 왔느냐에 따라서 그 감상이 천지차이로 달라질 것 같았다. 호수도 마치 사람 같구나 싶었다. 다행히 우리가 온 날은 날이 무척 맑았고 우리가 간 시간에도 해가 쨍쨍해서, 숨 막히는 밝고 아름다운 호수빛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그리고 그 빛깔이 너무 예뻐 질릴 즈음엔 이렇게 맑고 편안한 물도 볼 수 있었고.
이때 찍었던 에메랄드 사진은 그루의 캐나다여행 베스트포토로 선정되어 여기저기에 사골처럼 잘 우려먹었다고 합니다. 레이크루이스도 물론 너무 좋았지만, 한 프레임에 예쁜 호수와 산과 하늘이 조화롭게 잘 담겨서 아름다운 사진을 남겨 준 에메랄드레이크가 이젠 그루의 최애 호수가 되었다고 하네요.
역시 실물만큼이나 중요한 게 사진빨인가 봅니다. 흠흠
그 이후로도 캐나다에서 족히 열 개는 넘는 호수에 다녀왔음에도, 글 쓰며 떠올리다가 그때 싸웠던 생각이 나서 피가 조금 솟았다가 내려갔지만, 아름다움이 폭발하는 흡족한 사진이 다른 모든 경험을 압도한다. 화났던 기억마저 다 잊고 좋은 생각 좋은 기억만 가득가득 담기는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게 도대체 뭣이 중하다고 그리 싸웠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이렇게 예쁜 것 보면서 뭐 티격태격하고 있었니 너희들.
그동안 밴쿠버와 버나비에서 호수를 많이 보고 왔지만, 이렇게 누가 봐도 다른 색깔의 호수를 본 일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이래서 밴프, 밴프 하는구나 싶었다. 이 날부터 시작해서 퍼런 호수, 에메랄드 호수, 초록 호수 등 다양한 호수를 총천연색으로 질릴 때까지 보고 오게 된다. 이 나라는 이렇게 호수가 넘치게 많은데, 삶이 게임이라면 이 동네에서 호수 몇 개 떼다가 우리나라에 옮겨 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