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위장을 위로해주는 뜨끈한 라멘국물 한사발
나도 20대 중반까지는 이러지 않았다. 20일 넘게 여행을 해도 한국 음식 한 번 찾은 적이 없다. 고추장이랑 김이랑 라면은 도대체 왜 싸서 여행을 갈까, 집에 가면 실컷 먹을 텐데, 하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2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여행을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식 먹기가 힘에 부쳤다. 버터든, 빵이든, 고수이든, 입맛에 맞지 않는 양파 수프든, 무언가로 인해 한 번 입에서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입에 익숙한 그리운 그 맛을 간절하게 찾게 된다. 딱 원하던 순간에 한국 음식을 먹었던 기억은 끝내주는 현지식을 먹은 것만큼이나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가령 포르투갈 게스트 하우스에서 끓여 먹은 진짬뽕이라든지, 대영박물관 앞에서 먹은 떡볶이라든지.
30대 중반이 되어 떠난 이번 여행에서는 입이 더더욱 익숙한 맛을 내놓으라고 뇌를 닦달하곤 했다. 이번 로드트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날 저녁으로 육개장 사발면을 한 그릇씩 먹으며 황홀함을 느꼈고, 둘째 날 아침으론 우동과 초밥을 찾았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그리운 입맛을 따라 먹었다. 꼭 한식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우리 아시안 동포들의 음식이라면.
드디어 밴프 다운타운에 도착했을 때, 구글 지도를 이래저래 탐색하다 평점이 높은 한 라멘집을 보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웬 라멘이냐 싶기도 했지만 그런 발칙한 생각은 3초 정도 후에 증발되어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댓글에서도 호평 일색. 특히 한국 분들. 그들도 나처럼 입맛 향수병을 겪었으리라. 다소 과장되게 만족하는 그들의 후기를 보며 나의 기대도 한껏 높아졌다.
라멘을 위해 간만에 부지런을 떨었다. 오전 일찍 일어나 곤돌라를 타고 밴프 시내와 아름다운 산 구경을 이미 마쳤다(곤돌라 꼭 타야하냐고요? 흠, 잘 모르겠네요). 밴프 다운타운에 숙소를 잡으니 무척 편리했다. 외출했다가 숙소에 주차해 두고 나오면 다운타운 어디도 걸어서 금세 도착할 수 있으니까.
사람이 많다는 후기를 기억하며 오픈 시간에 맞춰 가게 입구에 도착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계단을 올라갔다. 아뿔싸. 부지런함이라면 비교할 데 없는 동양인들 네 다섯 팀이 이미 줄을 서 있었다. 이런 상황은 여행에서 종종 겪은 일이다. 어딘가에 일찍 도착하면 사람이 없거나, 동양인들과 만난다.
오픈시간이 되어 드디어 가게 문이 열렸다. 조금만 늦게 왔어도 큰일 날 뻔했다. 우리 바로 다음 팀까지 입장할 수 있었다. 다소 사무적인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 소리를 들으며 행복했다.
메뉴판을 보고 혼란스러워 할 필요 없다. 이미 후기를 읽으면서 무엇을 주문할지 다 정해놨기 때문이다. 평소 익숙한 돈코츠(돼지뼈육수) 베이스의 아라시 라멘으로 가자. "프리미엄 일본 녹차" 와 교자도 같이 주문했다.
두 개의 라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라멘은
우리 것일 것이었다가
우리 것이었다가
.
.
.
다른 사람들의 탁자로 갔다.
(모 시를 오마주했어요)
우리보다 늦게 온 애들 라멘이 먼저 나왔어!
그는 괜찮아, 라며 날 진정시켰다.
교자 한 입, 엄청나게 뜨거운 겉은 바삭바삭, 한 입 물면 파삭하고 두툼한 피 사이에 들어있던 육즙 가득한 소가 함께 가득 내 입으로. 바삭촉촉.
음~~~ 맛있다.
녹차, 일단 한껏 납작한 주전자부터 합격점이다. 주전자 때문에 맛있다고 하는 건 아니야. 이건 뭔가 깊은 맛이 나. 그 먼 일본에서부터 날아온 품질 좋은 녹찻잎일 거야. 아뜨뜨, 식혔다 먹어야지.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라멘의 등장! (철 지난 개그 알아보신 분 계실까요)
이렇게 인심이 풍부한 라멘이 있나. 죽순이 듬뿍 들어간 성의 있는 라멘이 나왔다.
면도 차슈도 죽순도 궁금하지만, 역시 가장 먼저 맛보고 싶은 것은 국물!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껏 들어 한 입 넘겼다. 맛은 두 글자. “땅 콩”.
살짝 당황했지만 한 번 더 먹어봤다. 그제야 국물이 “땅콩 돈코츠”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아, 이 맛이다. 내가 그리워하던 이 구수하고 뜨끈한 맛. 특유의 바다내음마저 사랑스러운 김도 한 입에 넣어 녹여 먹고, 탄탄한 면을 듬뿍 먹는다. 아, 맛있다. 오길 잘했다. 보들하고 큼직하며 두툼하기까지 한 차슈도 푸짐하게 한 입 베어 분다. 국물과 잘 어울린다. 여기 맛집 맞네!
먹을 걸 다 먹고, 계산서를 요청했다. 우리 테이블을 맡은 점원분은 서빙이나 응대가 그다지 친절한 인상은 주지 않아 조금 아쉬웠지만 계산서만은 금세 가져다주었던 것 같다.
약 육만 천 원.
그렇다. 한 끼 라멘 두 그릇과 교자, 녹차를 주문하고 육만 원. 어쩐지 사무치게 그립고 맛있더라니. 아흑. 물가 비싼 캐나다 중에서도 인기 많은 여행지인 밴프에서 맛있는 일본 라멘을 먹으려면 이 정도는 각오해야겠지. 어흑 어흑. 그런데 어라? 우리 죽순 추가한 적 없는데, 죽순을 추가해 버렸네. 오천 원 더 나왔네.
아까 우리 걸 다른 팀 먼저 준 게 맞네!
죽순 안 들어간 우리 라멘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버렸나 보다. 친절하지도 않고 메뉴 주문 실수까지 하다니. 점원 때문에 가게에 대한 인상이 조금 안 좋아졌다.
하지만 뭐 그게 대수인가. 나의 입이 막역지우 라면을 만나서 행복해하고 있는 걸.
다른 점원들의 친절한 작별인사를 받으며 행복한 배를 두들기며 가게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