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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밴프에서 컵밥 먹고 화해한 날

사람을 알려면 함께 여행을 해보라던데

by 정그루


밴쿠버에서 1000km를 넘게 달린 끝에 드디어 밴프에 입성했다. 그가 캐나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알려줬던 곳이다.


밴프는 캐나다에서 제일가는 관광명소이자 아름다운 자연의 끝판왕인 도시이다. 밴쿠버에서 하루만에 오기는 무리한 일정이라, 골든에서 2박을 숙박하며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이렇게 여행 3일 차에야 만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주차하기. 밴프 다운타운은 주차할 공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숙소에 주차를 해 두고 다운타운을 걸어 다니기로 했다.



그런데 숙소 주차장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당황하며 다시 한 바퀴를 뺑 돌아 숙소 입구에 도착했다. 내가 내려서 해결해 보기로 했다. 친절해 보이는 직원이 다른 손님을 응대하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영어가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할 때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이야기를 듣고는 흔쾌히 주차장 비밀번호와 차에 둘 출입증을 주었다. 주차장에 도대체 번호 입력하는 곳이 어딘지 찾지 못해 당황했지만, 어찌어찌 주차를 하고 홀가분하게 다운타운에 나왔다.



남편이 밴프 다운타운 유튜브를 신나서 몇 번 보여주곤 했는데, 나는 솔직히 어떤 곳인지 잘 와닿지도 않고 심드렁한 기분이 들었었다. 내가 저기 갈 곳도 아닌데 뭐, 하는 생각이었달까. 근데 내가 지금 화면에서 보던 그곳을 걷고 있는 것이다! 날씨도 무척이나 좋고, 카메라에 안 담기던 넓은 뷰를 나의 두 눈으로 실컷 담고 보고 있으니 저절로 흥이 났다.

나무로 지은 것 같은 정겨운 가게가 2차선 도로 양쪽에 죽 늘어서 있고, 그 사이엔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산이 같이 보인다. 밴프 다운타운부터는 내가 또 지도에 체크를 무척이나 많이 해 뒀다. 빠지지 않고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기분이 한껏 들떴다.



우리의 목적지는 ‘금강산도 식후경’, 한국 컵밥집이었지만 숙소에서 컵밥집이 거리가 좀 있었다. 어디를 향하더라도 가게가 가득이라, 기왕 가는 것 구경을 하면서 가기로 했다.


관광지에서 뭐 살 게 있겠나, 싶었지만 첫 번째 가게에서 덜컥 멋진 선글라스를 사고(빌려온 엄마 선글라스는 엄마에게만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세 번째 가게에서는 그의 옷을 몇 개 샀다. 내 가방도 새로 좀 사라고 했지만 방금 전에 선글라스를 샀으므로 양심적으로 거부했다(그는 내가 어딘가에서 산 멋진 대마잎 가방이 누더기 같다고 무척이나 싫어했다).


구경에 구경에 구경에 구경. 나에게는 천국인 상황이고 그에게는 밥 먹으러 가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상황. 비슷한 기념품들 구경을 하다 말고 그는 우리의 잠정적 목적지에 들어있던 안내소에 먼저 들르자고 했다. 이 과정에서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서로의 기분이 상했다.



여행 안내소는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레이크루이스와 모레인 호수(레이크와 호수가 병기되어 송구합니다)에 대한 정보도 구하고 싶었고, 또 우리가 놓친 건 없는지 해서 들르기로 했었다. 이번에도 내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현지인인 그가 나서서 이야기를 한다니 그게 맞지만, 난 아까의 기분까지 더해 부루퉁해져서 뒤쪽 기념품과 팸플릿 더미를 구경하며 딴청을 피웠다.



동굴 투어, 자전거 타기, 래프팅, 낚시, 하이킹…. 우리가 하고 오지 않은 것들을 포함해 정말 할 게 많았다. 적당히 딴청을 피우다 그가 있는 곳으로 가니, 직원분이 친절하게 이것저것을 알려주고 맛집 설명지도까지 주고 있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다시 나왔다.



그는 구경하고 싶은 걸 더 보라고 했지만 굳이. 별로 보고 싶은 것이 없어졌다. ‘크리스마스 콘셉트 가게’는 놓칠 수 없어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시크하게 사진 몇 장 찍고 나온 것이 다였다. 다툼에 기뻤던 흥이 떠나가버린 것이다. 그렇게 어색하게 한국 음식점 ‘한 끼’에 도착했다.



밴프에서 보기 드문 합리적 가격(와! 삼만 사천 원! 싸다! 흑흑)과 익숙한 한국메뉴 이름들! 가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으로 가득 차 있는 가게! 자랑스럽고 반가웠다. (기본으로 주문했을 때는 마요네즈의 양이 많아 좀 아쉬웠지만, 구글지도에 마요네즈가 아쉬웠다는 후기를 올리니 원하는 대로 마요네즈를 조정 가능하다는 답변이 올라왔다.) 아무튼, 우리는 사람 많았던 컵밥집에서 말없이 밥을 먹고 나왔다.





내가 여행의 흥미를 잃어버린 것 같아 미안했는지 그가 반대편에 보이는 곳에 들어가자며 적극적으로 날 데리고 갔다. 됐다고 하는 나를 너 이런 거 좋아하는 것 안다면서 끌고 갔다. 내가 텐션이 떨어지니 그가 텐션을 올리는군.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다.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후기를 나중에 보게 되었다.) 건물 자체가 지어진 지가 120년도 넘은 곳이어서, 내부에 건물에 대한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밴프와 그 인근 지역의 동물들을 박제로 전시해 둔 곳이었다.



박제라는 형태로 동물들을 남겨놓은 데에 미안함이 있지만, 미안함을 무릅쓰고 여러 가지 동물들을 실제로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고, 이 동물이 이렇게 컸구나, 하는 감각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동물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만남으로라도 만족해야지. 흑흑.)



따로 걸으면서 2층까지 찬찬히, 내 페이스대로 구경을 하고 나니, 그는 입구 옆 의자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앉아 조금 쉬었다. 굳이 나를 위해 박물관까지 보자고 한 것에 마음이 좀 풀렸다. 여행을 하면서 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기가 빨리며, 배고프거나 힘들 때 짜증을 내지만, 그래서 때로는 나의 흥을 꺾기도 하지만, 서툴게 그만의 방식으로 다시 그걸 만회하고자 노력한다는 걸. 미안함을 서툰 행동으로 만회하려 한다는 걸. 또한 목적 없는 구경은 좋아하지 않지만, 어딘가 갔으면 나에게 최대한 모든 곳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다는 걸.


"아까는 저쪽 가게들 봤으니까 돌아오는 길엔 반대편 보자. 보고 싶은 것 다 봐, 충분히 봐."


(그래 고마워)




옷 가게도 더 보고, 기념품 가게도 여러 개 봤다. 심혈을 기울여 우리 집 문에 붙일 자석을 골랐다. 나는 한 동네엔 한 가지 자석만 사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와 지내면서 한 군데의 자석도 두세 개를 살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두세 개를 산다고 해서 고민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었구나, 도 깨달았다.




충분히 구경을 하고 나서 후기가 좋았던 어느 건물 구석의 버블티까지 먹고 나자, 벌써 좀 피로가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 날 밴프 다운타운에 와서 풍경 구경을 세 군데 정도 더 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한편에 숨기며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를 밴프 다운타운에 잡자던 게 누구 아이디어였더라. 참 잘했다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미리 예약해서 더 싸게 왔어야 하는데, 쳇)



이 숙소는 특이하게 1층에도 숙소가 있었는데, 우리가 바로 그 1층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깔끔하고 좋아 보이긴 했지만 1층이다 보니 외부 소음이 들릴 때가 있어 프라이빗한 느낌이 좀 부족했다. 2층에 방을 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으나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편하게 들어와 쉬기는 좋았다. 그리고 특히, 오늘처럼 걸어서 피곤한 순간에 편히 들어와 쉴 수 있다는 점만 봐도 최고였다.


성의 없이 찍은 티가 초점에서 나버린 사진


침대에 걸터앉아 검색한 것은 역시, 저녁 메뉴였다. 밴프에서 있는 날 동안 맛있다는 건 다 먹어보리라, 생각했다. 이곳에 유명한 스테이크집이 하나 있어서 구글지도로 후기를 를 쭉 검색했다. 한국인들의 실망 후기가 네 개가 넘어가면서, 그중 한 후기가 추천하는 다른 레스토랑 이름을 발견해 그 후기를 훑기 시작했다.


첫 번째 가게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그래서 더 맛있고 현지인들도 좋아한다는 후기가 있었다. 다음은 이 두 번째 가게 '블루버드'에 대한 후기를 더 검색하러 네이버 블로그로 넘어갈 차례. 가게 후기들을 천천히 훑으며, 감이 왔다.



여기다. 우리 저녁. 문제는 예약인데…. 어디 보자…. 구글에 예약 사이트가 링크가 되네. 오늘 자리가 있네! 근데 시간이 좀 늦네.


“혹시 …. 밥 늦게 먹어도 괜찮아? 가고 싶은 데가 있어.”


“당연하지!”


씨익.

웃으며 예약을 했다.


“너 더 가고 싶은데 있지 않아?”

“아냐, 피곤하잖아.(응.)”


“있는 것 같은데, 말해 봐.”

“아니 뭐…. 흠. 이따가 밥 먹으러 나갈 때 조금만 일찍 나가자. 여기 다운타운 주변에 강도 있고, 정원도 있어서.”


“.... 그래, 알겠어. 근데 차 가지고 나가자.”

“엥, 차를?”


“아까 걸어보니까 너무 힘들어.”

“...... 알겠어.”


그렇게 우리는 잠깐의 달콤한 휴식 끝에 다시, 또 세 군데 넘는 곳을 탐험하기 위해 두 번째 여정을 떠났다.


그날 오후 다섯 시 반이 넘었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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