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 모순을 읽고
구체적으로 이 책이 어떻게 좋다는지는 모른 채로, 막연히 재미있고 좋은 책으로 알고 눈독 들이고 있었다. 책 이름부터가 멋있지 않은가, '모순'이라니. 더불어 요즘은 책을 맛깔나 보이게 하는 카드뉴스부터 유튜브까지, 알고 싶은 책이 있으면 금세 맛깔나게 알아볼 수 있다. 살짝 알아보려다가 너무 맛깔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스포를 당한 채로 책을 사게 되었지만. 다행히 책장 안에서 오래도록 잊히는 동안 중요한 스포일러를 잊고 새로 책에 빠져 감상할 수 있었다.
작가가 다른 작품과 병행하여 집필하지 않고, 어딘가에 정기적으로 원고를 연재하지도 않고, 스스로 오롯이 공을 들여 글을 썼다 했다. 한 챕터도 허투루 또는 쉬이 쓰인 곳이 없다고 했다. 어쩐지 두세 장만 읽었는데도 범상치 않은 책임을 느꼈다. 일단 주인공의 성격과 상황부터 흥미진진하고, 그 표현하는 문장들 또한 너무 찰지고 맛깔났다.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을 타자로 필사하곤 하는데 필사했으면 책을 지금 다 읽을 수도 없었을 거다.
누구라도 거저 얻은 것에는 애착이 덜한 법이다. 비싼 값을 주고 얻은 물건은 그 값만큼 알뜰살뜰하게 취급된다. 한 권의 책을 알뜰살뜰하게 읽는 법에 대해 궁리를 하다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메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양귀자 - 모순 중, 작가노트, p.301-2
공이 많이 들어간 책이었던 것이다.
에세이로 책을 내는 것이 꿈인 사람으로서, 스스로 정한 마감시간도 못 지키고 허덕이면서, 시간에 쫓겨 그저 글을 배설하고야 마는 사람으로서 '급'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서 그저 감탄했다. 모국어 작가의 글을 읽는 즐거움과 이유를 주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글 자체가 매우 재밌고 주인공 안진진이 처한 상황도 내가 딱 좋아하는 사랑 이야기에, 개차반인 아버지에게마저 낭만 서사가 들어있는, 복잡한 감정과 쌍둥이인 어머니와 이모의 하늘과 땅 차이인 생활까지. 흥미 가득한 내용이다. 그래서 1998년에 나온 소설이 지금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당당히 나와있는 거겠지. 크게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주인공들의 발언과 생각이 신기하다.
주인공이 아버지를 마냥 싫어할 수밖에 없던 이유, 어머니 대신 이모를 찾아가고 싶은 이유, 폭삭 늙어버린 어머니에게 느껴지는 묘한 생기, 타인의 삶이면서도 나의 미래를 미리 엿볼 수 있는 듯한 가족들의 삶 또한 흥미가 가득해진다.
책 말미의 창작 노트를 보면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써 둔 복합어들이 나온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이러한 상반되는 단어들의 조합을 보면서 하나의 단어에 따라오는 반대어에는 곡절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것을 소설로 풀어내셨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이야기에는 양면성이 가득하다. 이름은 '참 진'자를 쓰지만, 성씨는 '안'씨여서 '안진진'이 된 주인공,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과 애써 좋은 모습만 보여주게 되는 사람, 너무나도 폭력적이지만 그 안의 낭만과 사랑이 가득한 사람, 불행하다고 말할 자격도 없는 사람과 자기 불행이 훈장이며 억척스러운 힘이 되는 사람 등. 그 조합을 보며 가끔은 안타깝기도 했다. 뭐든지 중간 정도를 가진 '육각형' 상황이나 사람은 없는 걸까, 하고 말이다. 어쩐지 요즘 연애 트렌드가 '작은 육각형'의 사람을 찾는 거라더니.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서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양귀자 - 모순 중, 작가노트, p.302-3
가난과 고통을 다 겪었으나 아버지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다채로운 삶의 맛을 아는 주인공과, 온실 속 화초가 되어 아무것도 모르니 해사하게 세상과 사람을 재단할 수 있는 이모의 딸.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자신의 의도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에 자신만만하고, 모든 상황과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 믿고 모든 것을 계획 속에 사는 나영규와, 천애 고아로 형과 끈끈한 유대를 유지하며, 스러져 가는 작은 것들을 사랑하고, 상대에게 작은 마음과 희망을 표현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의 김장우. 이 여러 인물들은 어떻게 얽히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책을 보시면 금세 알 수 있다.
작가님께서 작가노트에서 우려하신 부분이 있다. 어떤 형태이든간에 독후감이란 것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입견을 만들고, 그것은 작가에게는 소망을, 독자에게는 감동을, 소설 그 자체에는 완성의 기회를 앗아가는 적이 될 수도 있다고.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는 모든 사람이 전부 '첫 독자'이길 꿈꾼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이 독후감을 쓰면서도 저어 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나 또한 이 책을 카드뉴스를 보고 확실히 선택하게 되었기에, 누군가는 나의 독후감을 보고 이 책을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 당연하다고, 모든 것이 완벽한 경우는 없다는 이야기는 인생에 있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 들을 수 있는 만고의 진리 같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 또한 결혼 전까지는 마음이 소용돌이칠 어려움이랄 것 없이 살아온 탓에 책 속 이모의 딸처럼 그야말로 겨자씨같이 가벼운 두께로 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랑 꼭 맞는 사람을 만나,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다툼 없이 살아가며, 내가 힘들 땐 나를 위로해 주는 든든한 사람을 만나고 싶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연애를 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세 마음이 식고 헤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겪게 된 결혼 생활은 그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나는 책에서 나온 것처럼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하였으며, '인생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또한 부정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면서 내 기대와 다른 부분, 나와 상대에 대한 무지로 어려움이 있었다. 다툼과 어려움이 있을 당시의 나는 무척 괴로웠으나 여러 가지 괴로움을 겪고 난 나는 이전의 나와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 또한 책에서 나온 부분.
세상의 숨겨진 비밀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몹시 불행한 일이다. 그것을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다.
12장. 참을 수 없는, 너무나 참을 수 없는
우여곡절을 겪고 난 지금의 나는 결혼 초기와 같이 가까운 누군가에게 연애나 결혼에 대한 계획을 묻지 않는다. 어떻게 지내냐고 할 때 섣불리 대답하지도 않는다. 책이나 영화를 봐도 저게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고, 음악을 연주하더라도 예전보다 조금 더 감정이 실리게 되었다. 아픔과 어려움이 없는 삶, 또는 아프고 어려울 기회를 주지 않는 삶이 불행할 수 있음을 느끼고 나면, 내가 가진 어려움과 고통 때문에 내가 조금 더 책을 읽고 무언가를 배우고 재미있는 걸 보며 즐겁게 살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의 어려움과 고통이라고 해 봐야, 지극히 온실 속의 고통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다양한 삶의 모습과 모순을 통찰로 '보편화'해주는 소설을 앞으로도 많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읽는 것 자체로도 재미와 감동을 주면서 작가가 느꼈던 다양한 양면성에 대한 고민을 나에게도 심어준 좋은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시면 좋겠다. 특히 나처럼 인생의 고민과 생각이 아주 많은 분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것 같고, '나는 솔로'와 같은 사랑과 선택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도 좋아하실 것이며, 나의 불행, 억울함, 상처에 고민이신 분도 좋아하실 것 같고,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앞둔 분께도 좋을 것 같다. 아, 소설을 쓰고 싶은 소설가 지망생에게도 강력 추천이다.
마무리하는 와중에 남편이 했던 장난스러웠던, 하지만 의미가 있었던 여러 말 중 하나가 떠오른다.
"부부가 좀 싸우기도 해야 돼. 너무 안 싸우고 만약 다 맞춰주고 따르잖아? 막상 그거 재미없다."
그루 평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