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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uwriting Apr 03. 2023

아는 맛에 취하고 싶은데,

아는 맛인데, 왜 그런지 그때 그 맛은 아니야



지난 시간을 추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냄새로 때론 맛으로, 또 어떤 때는 그저 그림처럼 단순한 이미지로 혹은 소리로... 그중 개인적으로 맛에 대한 기억이 특히 강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들 '집밥'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뜻하지 않은 순간에 문득, 그동안 먹어본 여러 가지 맛들 중에서도 멋지고 화려한 요리가 아닌 참 어처구니없고 심지어 음식에 대한 이름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음식들이 먹고 싶은 건 뭘까요?





힘들 때 먹었던 음식을 다시 맛볼 땐 힘들었던 시간이 떠올라




이것저것 갖은 야채를 잔뜩 넣고 김칫국처럼 끓여 먹던 모양도 비뚤 빼뚤하던 뜨끈한 수제비나 고구마에 밀가루와 온갖 콩을 다 넣고 단짠단짠 하게 버무려 먹던 범벅들....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한번 진지하게 시도를 했었지만 굉장한 이상한 맛이었습니다. 기억의 그 맛은 아니었습니다. 수제비 국은 지저분한 잡탕 찌개처럼 되어버려서 도저히 먹을 음식이 못됐고,  고구마범벅도 고구마가 들어간 밀가루 덩어리일 뿐 그 외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엄마에게 부탁을 해 보지만 엄마는 그런 음식들은 생각하기도 싫다고 절대 해주지 않습니다. 어릴 때 가난해서 전쟁통에 여럿이 먹기 위해 만들어 먹던 음식이라 그 음식을 생각하면 지난 힘들었던 시절 생각나는 게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아파도 엄마는 지금도 절대 죽을 먹지 않습니다. 그 맛은 부모님들이 살아온 시절이고 인생이고 그들이 기억하는 냄새입니다. 힘들고 지쳐서 그저 살기 위해 먹어야 했던 음식일 뿐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혼자 몰래 연구도 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  어쩌다 그 맛을 찾아낸 것처럼 흉내도 내보고 구현해 보지만 노인들 말처럼 '그 맛'이 안 납니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아,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젠 오히려 집에서 먹던 음식을 아이들이 해 달라고 하면 해주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해 달라는 음식도 역시 어처구니없는 것이긴 합니다. 굳이? 싶은 것들을 가끔 주문을 하곤 합니다. 우린 이렇게 사소한 '집의 음식들'을 살면서 더 오래 기억하게 되나 봅니다.






아는 맛에 취해보고 싶은 날,




문득, 아는 맛에 취해 보고 싶은 날 그때 그 맛에 한껏 취해보고 싶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참 많이 아쉽고 아련해집니다. 한편, 거꾸로 생각해서 알던 그 맛을 언제 어디서든 쉽게 맛볼 수 있게 된다면 흔한 만큼 그 맛을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맛을 기억한다는 건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기억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자신의 살아온 시간에 모두 함께 하는 것들이니 그 안에서 힘들 때 먹었던 것도 다 추억으로 떠올리는 그런 시간에 취해 보고 싶은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린 실제 하는 것보다 더 긴 시간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일부분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시간이 어떠해야 할지 항상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향기로 기억되고 어떤 것은 냄새로, 또 어떤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악취로 남습니다. 알던 그 맛에 취하는 것도 그 기억에 취하고 싶은, 그 기억 속에 다시 머물러 보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자리에서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훌륭한 음식들을 먹는 즐거움은 굉장히 크고 또 소중합니다. 그 또한 나중의 즐거운 추억으로 남겠지만 살면서 자신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삶의 어느 순간에 먹었던 음식들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합니다. 잡탕 같은 수제비 국은 그래서 사소한 음식이지만 마음 답답한 날, 속을 진정할 수 없어 방황하게 되는 날, 후련히 속풀이를 하고 싶은 날 특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 그 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 먹는 '그 맛'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아는 맛의 추억이 지친 삶을 사소한 것에서 끄집어내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고 생각이 됩니다. 또다시 단단히 힘을 내게 해 주니까요. 그래서 아는 맛의 추억을 하나쯤 갖고 있다는 건 분명히 행복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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