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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uwriting May 15. 2023

‘일기’를 방학 숙제로 쓰기 시작하면 벌어지는 일

검열을 전제로 배운 글은 진짜 글을 쓰지 못하게 한다


어릴 때 초등(국민) 학교 때부터 방학이면 항상 따라다니던 과제(?)가 있었습니다. 일기 쓰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 평상시엔 문제가 되거나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당시엔 방학만 되면 일기는 ‘숙제’가 되곤 했습니다. 꼭 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검사’가 분명하게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방학 숙제로 일기를 쓰던 방식은 자꾸 다른 걸 쓰게 한다



학교 입학 후 첫여름 방학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완고한 부모님 교육 덕에 정말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써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친구들이 어떻게 일기를 ‘해결’하는지 알고 저 역시 '시류'를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돌이켜보면, 당시의 일기란 그저 글을 쓰는 형식 중 하나를 익히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숙제로 배운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일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날짜와 요일 날씨였습니다. 제일 먼저 이 세 가지를 기록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신의 하루를 쓰는 거였습니다. 그날의 느낌을 나타내는 그림도 그려가며 일기를 써봤지만 매일은 그저 비슷해서 일기를 쓰는 것에 대해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솔직히 자세히 쓰게 되면 친구와 싸운 일도, 가끔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도, 혼자만 알고 싶은 비밀들도 모두 들키게 돼서 결국 혼이 나야 하니 가리고 가리는 내용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할 말이 없고 쓸 내용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꾸역꾸역 '적어야' 하니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지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가장 문제는 날씨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뉴스의 끝 머리에 기상 캐스터가 등장해 마커로 화면에 그림을 그려가며 날씨 예보를 하던 아날로그 시기라 지난 날씨를 일일이 기억하거나 근거를 다시 찾기가 매우 어려울 때였습니다. 처음엔 공책에 날짜와 날씨만 적고 빈 공책으로 하루하루 남겨두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곧... 아무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냥 뒀습니다. 내용은 마지막에 쓰기로 하고... 그렇게 숙제인 일기는 거짓말을 쓸 수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는 애물단지 그 자체였습니다.






자기 검열 없이 글을 쓰려면 많은 것을 걷어내야 한다



이젠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꼬박꼬박 시간을 내서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귀찮고 하기 싫었던 짐처럼 여겼던 것을 자발적으로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역시 사람일은 모르는 겁니다. 재능이 있어서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전 순전히 스스로를 정리하기 위한 숨구멍으로 활용하는 중입니다. 어느 정도 세월을 살고 보니 잊고 있던 자신이 문득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사느라 바빠서 스스로에 대해 등한시했던 시간을 하나씩 떠올리며 추억해 보는 행위로, 그렇게 해서 앞으로 또 나아갈 준비를 계획하게 하는 행위로 연장이 되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참 좋은 방식이고 그나마 뭐라도 쓸 수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합니다.



우린 모두 타고난 것이 달라서 각자에 맞는 방법으로 자신을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글, 그림, 음악이나 혹은 몸을 쓰는 그 어떤 것도 몸과 마음만 건강하다면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여러 시도들이 있고 난 후 그중 하나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이런 거리낌 없는 시도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써 일기가 활용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일 그랬다면 좀 더 일찍 글을 쓰겠다고 들어섰을까 싶긴 합니다. 자기 검열보다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나타낼 방식을 찾아가는 노력이 조금은 더 빨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순간순간의 기억은 소중합니다. 희소한 시간을 얼마나 더 아껴 썼을까 싶긴 하지만, 최소한 자기 검열에 충실해서 칸칸이 놓인 빈 원고지와 하얀 워드 페이지를 그저 바라보는 막막한 시간은 덜 보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겐 검열의 장치들이 너무 많았던 걸 깨닫습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자기 검열! 수많은 규칙과 도덕, 윤리의 좁은 통 안에서 숨 막혀있던 시간들이 무척 길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자기 방식대로 틀도 내용도 한정하지 않고 써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스스로 깨닫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지금의 이 글도 누군가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발행을 망설이게 되지만 뭐,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의 남은 제 시간에는 메모나 쪽지, 설사 낙서라 하더라도 남루한 그것들을 다듬어가는 행위가 항상 함께할 예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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