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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uwriting Jan 03. 2024

페르시아어 수업 Persian Lessons

살아남기 위한 거짓말과 기억으로 살려낸 사라질 뻔한 이름들,


세계 2차 대전 유대인 학살이 한창이던 때,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독일군 장교 코흐(라르스 아이딩어) 앞에 유대인 질(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이 등장합니다. 유대인 질은 죽음을 향해 끌려가던 중 오직 살기 위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페르시아어를 알지도 못하는 질은 코흐의 페르시아어 수업을 위해 매일 밤 거짓말을 지어내야 합니다.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 싶지만 바딤 페렐먼 감독의 <페르시사어 수업>은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지로 끌려가던 트럭에서 우연히 샌드위치 반쪽과 바꾼 책 한 권, 그것이 자신의 생사를 결정하리라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요? 인간이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별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죽을지 살지 모르는 공포의 상황에선 오직 한 가지, 그것이 무엇이던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질은 그렇게 오직 생존을 위해 페르시아인이 됩니다.    






매 순간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것이 지긋지긋해요


배고픔이 싫어서 요리를 배우고 주방을 담당하는 장교로 전쟁에 참전 중인 코흐에겐 꿈이 하나 있습니다. 페르시아어를 배워서 전쟁이 끝나면 테헤란에 식당을 차리는 것입니다. 나름의 계획으로 페르시아어를 배울 방법을 찾던 중 포로로 잡혀온 질과 만납니다. 매일 일과를 마치고 단어를 배우기로 한 두 사람, 이때부터 질에겐 심각한 고민이 생깁니다. 자신이 페르시안이라고 속여 목숨은 건졌지만 매일밤 무슨 수로 그 많은 단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가능하긴 한 일일까? 죽음과 다른 깊은 불안에 빠집니다.





식당에서, 채석장에서, 그 어디에서 일을 하더라도 꼭 매일 밤이면 페르시아어를 가르쳐야 하는 질, 몇몇 독일군들에게 끊임없이 의심을 사고 있었지만 코흐의 보호 아래 아슬아슬 고비를 넘깁니다. 우연히 포로들의 명부 작성을 돕던 중 질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명부에 적힌 이름들의 일부를 페르시아어로 바꾸는 것! 그렇게 해서 두 사람만 아는 페르시아어가 탄생합니다. 그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거짓 페르시아어. 물론 코흐는 알 수 없습니다. 코흐의 학습 열기는 대단해서 매일 익힌 단어는 무려 2,000개가 훌쩍 넘게 됩니다. 배운 단어로 문장을 연습하고 간단한 회화까지 하며 코흐는 나름 뿌듯해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코흐가 배운 숫자는 죽은 유대인이 수를 의미입니다.






2,840개의 거짓말과 거짓으로 드러난 진실들


지루하던 전쟁은 점차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며 그간 자신들이 해왔던 잘못을 없애야 하는 시점에 이릅니다. 기록을 불태우고 모든 근거를 없애야 합니다. 코흐는 자신이 테헤란으로 떠나야 할 시점이 왔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질은 전쟁이 끝나가는 무렵까지 거짓말로 지탱해 온 자신의 삶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을 유지할 수 없어 죽음을 향해 가는 유대인 무리를 따라가지만 코흐가 질을 빼냅니다. 매일매일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순간들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힘들다고 말하는 질에게 코흐는 자신과 함께라면 아무 일이 없을 거라며 안심시킵니다. 죽음의 행렬에서 질을 구해내는 것으로 코흐는 나름의 우정을 드러냅니다.






실화가 바탕인 영화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극적인 상황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져서 보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가능하지? 계속 의문이 들었습니다. 다른 포로들과 독일군 모두에게 의심을 받으며 생존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거짓말이 저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 극한 상황에서 발휘되는 인간의 기민함이 놀라울 뿐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코흐는 테헤란으로 떠나고 질은 다시 유엔군의 포로가 됩니다. 특별한 구성에 놀라움이 전혀 없던 영화는 이 부분에서 통쾌한 반전과 감동을 줍니다. 코흐가 테헤란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받던 중 자신이 바보처럼 거짓말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습니다. 그의 분노는 안타까울 지경이지만 패망한 독일의 장교가 극적으로 희화화됩니다. 반면, 질이 울먹이며 하나씩 읊어내는 죽어간 사람의 이름들 - 거짓 페르시아어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하게 해 준  2,840개의 이름들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됩니다.







생존을 위해 수많은 죽음들 앞에서 거짓으로 만들어낸 거짓 단어들이 자신의 목숨을 살리고 기록조차 사라져 버렸지만, 질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수많은 이름들과 독일군이 불태워버린 명부의 클로즈업은 <쉰들러 리스트>의 '생명부'를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기록은 사라졌지만 허무맹랑할지언정 거짓 언어가 기억으로, 그 기억이 진실의 기록을 되살려 역사를 기록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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