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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uwriting Jan 10. 2024

화이트 크로우 The White Crow

밖에서 보면, 변화시켜야 할 것과 새롭게 필요한 것들이 더 잘 보인다



하얀 까마귀,
유별나고 평범하지 않은 아웃사이더 같은 이들을 칭하는 단어






랄프 파인즈 감독의 <화이트 크로우>는 소련의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가 프랑스로 망명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1961년 키로프 발레단이 프랑스에 도착해 공연을 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소련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루돌프 누레예프(올렉 이벤코)는 파리의 문화, 예술, 음악들을 접할 기회에 마음이 들뜹니다. 하지만 KGB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의 행동에 대해 점차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시베리아 횡단 급행열차 있나요?


루브르박물관의 그림과 조각들 사이사이 루디의 시선을 따라가며 같이 명화와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 참 좋습니다. 촘촘한 영상의 시선을 따라가면 루디가 그림과 조각을 바라보는 댄서로서의 관점괴 호기심을, 그의 심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바라보는 자유 평화 박애... 소련과는 다른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루디의 꿈과 설렘이 그의 자유분방함을 끄집어냅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아버지와 만나고 버려졌던 순간을 기억하던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루디가 아버지에게서 느꼈을 따듯함이 그래도 조금은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과 그림들의 섬세한 클로즈업, 영상 연출이 무척 섬세합니다. 냉전시대에 만난 소련과 프랑스 발레단의 어색한 만남은 당시 서로 교류할 수 없던 양극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루디는 클라라(아델 엑사르쇼폴로스)와 친해지지만 문득문득 무례함들과 고집이 드러납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기차에서 태어난 루디는 남들보다 늦게 발레를 시작했지만 키로프 발레단에 들어갑니다. 어릴 때부터 마르고 언제나 혼자였던 루디, 사람들은 루디를 하얀 까마귀라고 불렀습니다. 레닌그라드 무용학교에 들어간 루디는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푸쉬킨(랄프 파인즈)의 교습을 받으며 빠르게 실력이 성장합니다. 어릴 때 가족과 함께 표 1장으로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갔던 순간 샹들리에의 아름다움에 반해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했다던 루디는 남들보다 더 가혹하게 연습을 했고 남자 발레리노의 발레 수준을 바꿔놓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공감을 이끌어낼 줄 아는 발레리노, 키로프 발레단의 대표 무용수가 됩니다. 하지만 그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격, 호기심 많은 도전들이 KGB의 눈에는 점점 거슬립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으면 무용을 할 이유도 없어요


소련의 공산 체제를 벗어난 첫 해외 공연에서 배운 것들은  루디의 정신세계와 무용에 대한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자신이 탄압받고 있다고 느끼는 인식은 그동안의 규칙과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유를 갈망하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발레가 러시아에서 더 활발하게 성장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었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 체제인 소련이 강력하게 요구하던 '복종'이라는 한마디 표현으로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전체주의 국가 소련과  복종이 필수인 발레의 규칙들은 겉으로 표현되는 아름다움 너머의 이질적인 세계관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푸쉬킨을 통해 무용을 해야 하는 이유와 목표를 갖게 된 루디. 자신은 발레의 기술만 가르친다던 푸쉬킨의 조소 섞인 한마디에서, 어쩌면 루디의 망명이 푸쉬킨 자신의 희망이기도 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정말 멋지게 도약했군!  그래서 뭐? "  


답답한 현실에서의 탈출을 꿈꾸며 어쩌면 푸쉬킨도 루디만큼이나 강력한 지유를 갈망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문에 망명한 루디를 반역죄로 재판하겠다는 소련 공산당이 더욱 부끄러웠던 것이 아닐까요?




KGB는 급기야 루디를 런던행에서 빼내 모스크바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루디는 강하게 저항합니다. 모스크바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 루디는 클라라와 프랑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망명을 합니다. 평생 자신의 조국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 슬픔이 그 이상의 분노와 환멸보다 작다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경직된 사회일수록 가장 먼저 제약을 받는 것은 창작입니다. 자유분방한 생각과 표현이 억압의 대상이 됩니다.





창작, 예술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이고 또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똑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기교와 지식과 문장 구성의 완벽함! 하지만 진심 어린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다면 무슨 존재 이유가 있을까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해야 글을 쓰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미사려구의 잔치가 아닌 일상적인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진심은 전해집니다.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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