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왜 몰랐을까?
이 지점만 벗어나면 이젠 괜찮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 지점을 벗어나는 순간이 바로 더 깊은 심연에 빠지는 순간이라면? 나락의 끝인 줄 알았는데 더 깊디깊은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면?
너무 끔찍해서 믿고 싶지 않지만 그런 일은 한 개인의 믿음과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선택의 범위가 아니라 주어지는 현상, 하지만 그 현상을 또 살아가야 하는 순간이 오면 벗어날 수 있는 현실인지조차 감이 잡히질 않을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좌절에 빠집니다.
왜 몰랐을까요?!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이던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잘한다는 말입니다. 또 나중에 다른 사람을 겪어 보면서 그전 사람이 더 괜찮았다고 평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얼마나 현실이 갑갑하면... 이런 말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될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난 시간도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더욱더 불만인 상태라는 의미일 겁니다. 이런 학습된 언어는 지난 것이 더 맞았다거나 아니면 예전의 사람이 했던 것이 옳았다(상대적으로 지금보다는 그때가 더 나았다는 의미로)는 무의식을 만들어냅니다. 이 무의식은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떻게 작용할까요?
구관이 아직 버티고 있는 건 정말 명관이기 때문일 수도, 혹은 그와는 상관없는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삶이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지난 시간이 아직 현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 구질구질하고 더러운 시간 위에서 우린 아직 끊임없이 흔들리는 줄타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냄새나고 질척거리는 판을 벗어난 줄 알았는데 짹깍거리는 시한폭탄이 눈앞에 나타났다면 어떻게 할까요? 삶의 큰 고비를 막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또 다른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려온다면 삶의 의지는 꺾이기 쉽습니다. 좌절할 수 있고 불가항력의 일을 반복해서 겪다 보면 세상 모든 불행이 자신에게만 꽂히는 것 같고 살 이유를 찾기 힘들어집니다. 그나마 실낱같은 생존 본능이 작용한다면 또 꾸역꾸역 버티기야 하겠지만 그마저도 구차한 순간이 될 때, 시간은 폭탄과 함께 위험 속으로 흘러갑니다. 매일 짹깍짹깍... 언제 어떻게 터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맞지 않는 조직에서 함께하기 불가능한 구성원들과 하던 일을 벗어나 다른 조직의 새로운 구성원과 함께하게 되지만 더 큰 문제가 있는 조직에 발 담그게 된 것이라면... 사악하고 무능한 사람을 막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끝에 포악함까지 장착한 무지렁이가 떡 버티고 있다면... 유사한 일은 매일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그 사이를 헤집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일상은 그래서 때때로 많이 벅차기도 합니다. 이제 좀 살만한가 좌우를 둘러볼 틈도 없이 갑자기 건강을 잃거나 부모와 자식과 친구들, 지인들까지 자신의 삶과 연결된 모든 고리가 급격하게 헐거워집니다. 손에서 고리들이 하나씩 미끄러져 빠져나갈 때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작은 매듭이 필요합니다.
똥은 더럽습니다. 질척거며 버티고 갈 수는 있습니다. 폭탄은 언젠가 터집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그냥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습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게 됩니다. 모든 위험이 제거된 시간이란 삶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무난하고 행복해 보이는 삶도 속에 하나쯤 해결하지 못하는 고민을 갖고 있고 겉으로 모두 절레절레하는 삶을 살아도 하나쯤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갖고 삽니다. 비단길에 구르던 똥밭에 구르던 결과는 끝날 때까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지금 어디 발 닿아 있는지 중심은 잘 잡고 있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나아가면 그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