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그땐 국민) 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다. 13살이 되도록 그렇게 고급진(?) 어휘를 접해 보지 못했던 나는, '미인'이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미묘한 어감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을 들고 한 줄로 서서 검사받던 중, 내 그림을 보고 하신 말씀이셔서 어렴풋이 그림 칭찬을 하시는가 보다, 고 이해했다. 나중에 정확한 뜻을 알고부터 나는 스스로를 '팔방미인'이라고 여기며 살고 싶었다.
문제는, 진짜 팔방미인이었다면 여러 가지 성취를 해냈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 제도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 어려운 가정 형편이, 혹은 자기 계발을 소홀히 한 나 스스로가 원인이었는지 모르겠다. 과거 팔방미인은 어디로 가고 왜 나는 무엇하나 특별하게 잘하는 것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어른으로 성장해 버린 걸까?
What is your hobby?
대학에 입학해 영어회화 학원을 다닐 때, 항상 곤혹스러웠던 질문과 만나곤 했다. 외국인 강사들은 꼭 첫날 이름과 하는 일, 취미 등의 자기소개를 시켰다. 이름과 학생임을 밝히고, 취미를 말할 때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자기 자신이 여가 시간에 무엇을 즐기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당혹스러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입시 공부만 하던 대한민국의 딸, 아들들이 과연 여가 시간이란 것이 있기나 했었나, 하는 원망스러움. 그런 감정들이 앞섰지만, 일단은 뭔가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 둘러대버렸다. 그런데 가장 좋아하는 책과 작가를 묻는 강사의 연이은 심화 질문에 그만 아연해진 나는,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라 결국 바보처럼 웃기만 하고 말았다.
교과서와 책으로만 살아온 학창 시절, 즐기며 할 만한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 기타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가 어려운 형편에 대학도 고집부려 간 이기적인 큰딸이 끝내 자기만 아는 속없는 딸, 언니냐는 눈총에 시작도 해보지 못했다. 언젠가 가까운 지인이 취미가 뭔지 물어보기에 '거울 보며 춤추기'라고 말해서 한바탕 웃었던, 삶을 즐기며 사는 방법을 모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결혼 후 아이들이 자라 어느 정도 심리적 여유가 생긴 뒤, '영화 감상'이라는 좀 더 그럴듯해 보이는 취미가 생기기는 했지만, 뭔지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결핍감은 설명이 안되었다.
다른 세상을 엿보는 취미 생활
어렸을 때 가정형편상 읽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사서 읽을 수 없어서 마루 한 켠에 <세계문학전집>으로 꽉 채워진 책장이 있던 친구네를 무척 부러워했었다.
결핍은 욕심을 낳는지, 돈을 벌기 시작하자 책 욕심을 부린 나는 책을 수집하듯이 사들였다. 소장 가치가 떨어지는 책은 도서관을 활용하면 될 텐데, 읽고 싶으면 우선 사다 책장에 꽂아 두어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책으로 꽉 차 있는 책장을 보면 부자가 된 듯 흐뭇해하며.
책을 통해 만나는 세상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어릴 때 엄마께 심하게 혼이 난 날엔 <소공녀> '사라'처럼 다른 곳에 더 좋은 친엄마가 계실 거라는 앙큼한 상상도 해보았고, <키다리 아저씨>의 후원으로 내 꿈을 이룰 것이라는 얼토당토 아니한 꿈도 꾸었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책은 나를 위로해 준 고마운 친구였다.
신경 쓸 일이 많아지면서 긴 호흡으로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책과 띄엄띄엄 만나게 되자, 더 자주 만나게 된 것이 '영화'였다. 영상미와 웅장미, 화려함은 큰 스크린으로 봐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며 주말마다 영화관에 가서 1편씩은 보고 왔던 시기. 팝콘 각 잡고 홀로 감상하는 2시간여의 시간 동안, <미드나잇 인 파리>는 나를 프랑스 파리로 데려다주었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은 기억의 오류에 대해 재고하게 해 주었고, <대니쉬 걸>은 평소에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성 정체성의 문제와 만나게 했다. 책과는 다른, 시공간을 뛰어넘는 영화 속 세계와의 만남을 나는 퍽 사랑했다.
그렇게 '책'과 '영화'는 나와 물리적으로 닿기 어려운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였다.그것들을 통해 세상의 절반을 만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내 세상을 만들어가는 취미 생활
나이 40이 훌쩍 넘어 '한국식 오카리나'와 '브런치 글쓰기'를 하면서 내가 느꼈던 결핍감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교사 연수를 통해 우연히 만난 '한국식 오카리나'.
딸, 아들이 집에서 피아노와 플루트 연주를 할 때 옆에서 같이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이 한국식 오카리나였다. 아이들의 악기로만 알던 악기가 전문 오카리니스트의 손과 입에서 가슴을 절절하게 울리는 악기로 재탄생하는 것에 반해 3년째 이어오고 있다. 내 기분에 맞는 곡을 골라 내 마음을 다스리는 연주를 한다는 기쁨은, 책이나 영화가 주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아직은 햇병아리 연주자이지만 다른 회원들과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갖는다. 무대에서 오롯이 오카리니스트로서 청중에게 힐링과 감동을 전달할 때의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하다.
이제 두 달이 지난 '브런치 글쓰기'.
학창 시절 이래 글쓰기에서 손을 뗀 25년여의 시간을 마치 축지법으로 건너온 듯, 매일 글을 쓰고 있으니 '브런치'는 마법의 공간임에 틀림없다. 매일 글을 쓰며 흔하던 일상을 새롭게 보는 안목에 눈을 뜨고, 이를 통해 일상이 주는 행복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덕분에 <글모사> 회원들과 새로운 인연도 맺게 되었으니 이 또한 놀라운 일.
나의 일상과 일상을 통한 통찰의 순간을 나의 언어로 써 내려간다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작업임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은 한때 문학소녀였던 그 시절로 타임슬립 한 듯, 나를 순수한 소녀 감성으로 물들인다.
물론 매끄럽지 않은 문장과 어휘력 부족 문제는 때로 나를 옥죄어 오기도 하지만, 그쯤은 '창작의 고통'이라 받아들인다. '책을 내서' 작가가 아니라 '글을 써서' 작가가 되어 보는(스테르담님 말씀 차용) 기쁨에는 견줄 바가 아니니까.
나를 위로하는 오카리나 연주와 나의 삶에서 일상의 보석을 끌어내는 글쓰기는, 타인들의 세상 엿보기만 해오던 나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리게 해 주었다.
내 나이 40이 훌쩍 넘어 만난 두 가지 취미 만으로도 나의 여가 시간은 너무 바쁘다. 이제는 가끔 그 사이 짬짬이 영화를 보고, 책도 읽는 것 같다.
오카리나를 연주하고 글을 쓰는 순간, 그 순간에 몰입하는 나를 사랑한다. 40대에 새로운 취미를 만났으니 50, 60대에 또 다른 취미를 만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어릴 적 팔방미인이 70대가 되어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피울지, 누가 알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