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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쓸모 있는 사람

by 정혜영



끝 모를 언택트 시대.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못 보고 사는 삶이란 절인 배추 같다. 생기 없고 짠맛만 가득한. 맛이라도 보려면 씻어서 갖은양념을 해야 할 텐데. 여러 사람들이나 학생들을 상대해야 하는 나 같은 직업군 종사자들이라고 강철이나 플라스틱으로 심장이 만들어졌을 리도 없고.


어버이날을 맞아 직접 뵌 지 1년이 넘은, 홀로 계시는 친정 엄마를 만나고 왔다. 미리 내려간다고 하면 절대로 내려오지 말라고 하셨을 거라 귀띔도 안 했다. KTX 1인 왕복 티켓을 예매할 때, 엄마가 항상 손녀딸을 그리워하신다는 생각에 잠깐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기엔 여전히 현실이 녹록지 않다.


고속 열차로 내가 자라난 곳이자 엄마가 계시는 친정댁에 가는 시간, 2시간 30여분. 그 시간은 소설책 한 권을 읽어도 후딱이고 노트북을 켜서 글 한 편을 써도 후딱 지나가는 시간이다. 그만큼만 가면 만나게 되는 길.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수도권의 코로나 확진자 수로 인해 친정 엄마의 만류가 크긴 했지만 아내, 엄마, 직장인의 삶을 핑계 삼아 내 한 몸 움직일 생각을 못한 게 더 큰 이유였을 거다.

오랜만에 나의 유년기를 보냈던 곳에 도착하니 어쩐지 마음이 노곤해졌다. 택시 기사님의 정겨운 사투리에 엇박자를 내는 내 말투가 이질적이었다. 떠나 산 지 얼마나 된다고. 그래도 고향이니까 용서해 주겠지. 괜히 되지도 않은 지역감정에 기대었던가.


친정 엄마의 아파트 앞에 내려 엘리베이터 앞에서 엄마께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 다시 걸었는데 또 통화 중.

잠시, 연락도 안 하고 내려갔다가 장모님이 1박 2일 어디 가셨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엄마를 잘 아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리 답했었는데. 다시 걸어도 통화 중. 안 되겠다. 친정 엄마 집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울리더니 엄마가 받으셨다. 그럼, 그렇지.


"엄마, 누구랑 그렇게 통화를 길게 하셔?"

"아~ 00한테 전화 와서... 하다 보니 또 길어졌나 보다."


00은 남편과의 사별 후 얼마 전에 하나 남은 자식까지 결혼시키고 다시 홀로 된 사촌 언니 이름이었다. 사촌 언니이기는 하나, 여러 형제 중 막내였던 친정 엄마와의 나이차가 나와의 것보다 적어 나보단 엄마와 더 친근한 사이이다. 자식들을 홀로 키워낸 여성들 간에는 나이차를 넘어서는 공통된 감정이 있는 듯하다. 연대감이랄까, 동지애랄까.

통화하는 사이 엄마 집 앞에 당도했다.


"내가 전화해서 얘기 다 못 끝내고 끊은 거 아니야?"

"괜찮아. 맨날 하는 얘기, 별 거 없지."

"그럼, 문 좀 열어봐."


엄마는 순간 얘가 무슨 소릴 하는가, 하셨나 보다. 뭔 소리냐 하셨다가,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고 문을 여실 때 얼굴 가득 놀라움과 반가움이 겹쳐진 표정이신 걸 보니. 갑작스러운 반가움은 그 강도가 극대화되는지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덥석 안으셨다. 어릴 때는 유독 큰딸인 내게만 스킨십이 야속하셨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주체가 바뀌어 내 쪽이 곁을 아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다는 말로 반가움의 정도를 표하셨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엄마와 단 둘이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었다. 아직은 식당에 가기 무섭다 하셔서 평소 좋아하시는 돼지갈빗집에 전화 주문 후 찾아왔다. 수도권에서는 요새 배달을 안 하면 식당 운영이 힘들 텐데, 사회적 거리두기 1.5 단계인 지방에선 배달 안 해도 가능하다 가벼운 문화충격이었다. 운반하는데 걸린 시간만큼 식은 고기가 조금은 아쉬웠지만 엄마는 너무 맛있게 드셨다.

나도 안다. 엄마도 이제 막 나온 뜨끈뜨끈한 고기를 더 좋아하실 거라는 걸. 본인이 좋아하시는 취향이나 기호는 다 큰 딸이 보내는 어리광에 양보하셨다는 걸.


친정 엄마는 신체의 연로와 더불어 정신력도 급속도로 연약해지시는 것 같아 걱정이다. 잠시도 엉덩이를 집에 붙이지 못하고 돌아다녔던 나의 20대 때, 남의 집 딸들은 엄마랑 같이 잘도 다닌다는데, 하며 푸념하시던 엄마셨는데. 언젠가부터는 같이 어디를 가자고 해도 싫다고 하신다. 모르는 사람 만나는 게 버겁다고 하신다. 세상에 남아있는 자신의 쓸모를 모르겠다 딸의 마음을 서늘하게 하신다.


"그래도 네가 이렇게 나를 보러 와 주니 나도 아주 쓸모없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


엄마 말씀에 또 한 번 마음이 번거로워졌다.


"엄마, 나이 든 자식들은 좋은 일 생기면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엄마야. 나보다 더 기뻐해 줄 사람이 엄마라는 걸 아니까. 내게 기쁜 일 생길 때 알릴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슬프겠어. 엄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힘이 돼."


또 반복해 말씀드려야 했다. 나이 든 자식에게 부모는 그 존재만으로 힘이 된다는 것을 부모들은 얼마나 자꾸 말해드려야 아시는 걸까.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딸이 손을 빌릴 때마다 먼 걸음 오셔서 도와주시던 때를 엄마는 본인의 '쓸모' 시기로 각인하고 계셨나 보다. 이제 손주들을 대신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을 돌보아 주실 사람으로 필요로 하는 난, 여전히 이기적인 자식이다. 그렇더라도 엄마 식대로 엄마가 '영원히 쓸모 있는 사람'임을 아셨으면 좋겠다.


저녁에 잠시 외출했다 들어오니 엄마께서는 거실에 마련하신 잠자리에서 잠들어 계셨다. 이제는 침대에서 안 자면 허리가 아프다고 하셨었는데. 엄마 옆에 나란히 누워 엄마 손을 내 손으로 가만히 감싸 보았다. 잠시 후 불편하셨던지 뒤척이시며 손을 빼셨다.

나도 엄마 나이가 되면 내 자식이 찾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 때가 오겠구나. 그래도 먼길 오는 자식들이 힘들까 봐 한사코 오지 말라고 하겠구나.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평안하시길 바랄 새도 없이 곤히 잠이 들어 버렸다. 절대적인 평안 앞에서는 그렇게 쉽게 잠이 드는 거라는 걸, 또 새삼스레 복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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