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방송 유명 디제이의 오프닝 멘트를 들었다. 한때 유행했다는 '세대별 없다 시리즈'라는데 유행하고 거리가 먼 난 들어 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익숙할지 모르지만, 이런 내용이다.
10대 - '철'이 없다. 20대 - '답'이 없다. 30대 - '집'이 없다. 40대 - '돈'이 없다. 50대 - '일'이 없다. 60대 - 낙'이 없다. 70대 - '이'가 없다. 80대 - '처'가 없다. 90대 - '시간'이 없다. 100대 - '다 필요' 없다.
디제이는 이어서 없는 것에 미련두지 말고 나에게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는, 다분히 공익적인 멘트로 마무리를 지었다.
80대에 '처'가 없다는 것을 보니 저 시리즈가 남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유머겠거니, 짐작한다. 처음엔 풋, 웃었는데 곰곰이 곱씹으면 웃음 뒤에 병풍 쳐진 삶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철없던 10대 소년이 지난한 생을 거쳐 노쇠해가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져서 한편 짠하다. 저 어디쯤에서 하나가 아닌 둘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열된 '없음'에 둘이라 채워지지 않는 절대 고독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나 없이 살다가 없이 가는구나... 감상도 너무 길면 청승이다. 이쯤에서 제정신을 차려야겠다.
디제이의 말대로 기분 전환하여 내게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가족(남편과 아이들)', '일', '집(온전히 내 것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건강(조금씩 삐걱대기 시작하지만...)'.
와, 이 정도면 다 가진 것 아닌가? 내가 이렇게 다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다 가진 것을 왜 여태 몰랐을까. 분명 가지지 못한 것만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15년 된 탈탈거리는 차를 몰고 다니다 보니 남들은 이 나이면 다(?) 모는 것 같은 고급 세단에 눈길이 갔다. 테라스에서 가꾼 텃밭에서 상추 따서 삼겹살을 해 먹었다는 말을 들으면 테라스 있는 집에 살고 싶어 졌다. 자식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스스로 살아가도록 독립시켜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으면서도 자식들 살 집까지 마련해 놓은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신기했다(정말 신기하다. 난 이 나이에 내 집도 다 마련이 안 됐는데 어떻게 자식들 집까지 마련하는지 내 머리로는 셈이 안 된다).
이러다 몇 년 후면 괜찮은 대학 들어간 친구네 자식들 부러워하려나.
결국 본연의 내가 아닌 나를 둘러싼 '외적인' 것들의 소유 유무로 있고 없음의 판단을 해 온 것이다. 끊임없는 욕심은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보며 이미 있는 것에 대한 가치를 쉽게 평가절하한다. '있는' 자가 '없는' 자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얼마 전까지 이제 내게 젊음은 다시 올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크게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한낱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대신, 자연스럽고도 우아하게 나이 들기를 바라기는 했다.
그런데 말이다. 곰곰 생각해 보니 오늘이 내게 남아있는 생(生)의 날들 중 가장 젊은 날이 아닌가. '젊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가장 젊은' 날을 살고 있는 것이다. 20대의 젊음과 비교하면 한없이 쪼그라들겠지만, 비교는 불행의 뫼비우스에 접어드는 첩경이다. 비교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내일의 나 끼리만 하는 것이다.
'가장 젊은' 날을 살아가는 나에게 응원을 보낸다.
가장 젊은 오늘, 가장 멋지게 살자. 가장 품위 있게 말하고 가장 우아하게 웃자.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게 걷고 좋은 사람과 대화하자. 먼저 포용하고 더 경청하며 더 깊이 성찰하자.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내게 가장 좋은 대접을 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