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위에 접힌 종이쪽지가 눈에 뜨였다.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는 없었는데. 점심시간에 누가 또 복도에서 뛰었나 보군. 복도에서 뛰어다니는 친구를 보면 말하라고 했더니 간혹 책상 위에 뛰는 친구 이름을 적은 쪽지를 놓고 가는 아이가 있었다. 그건가 보다 했다. 정당한 이유라도 친구의 잘못된 행동을 고하는 다른 아이의 모습이 그다지 예쁘지는 않다. 그래서 딴 일 하면서 관심을 멀리 했다. 아이들 안 볼 때 슬쩍 버리려고 했는데, 쪽지 한쪽에 '00 올림'이라는 글귀가 보였다. 펼쳐 보니 '00이랑 00 올림'이라고 쓴 메모 뒤편에 나를 그린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급식 먹고 올라와 서둘러 그린 것인지 색칠이 안 된 연필그림이었다.
(좌)올해 2학년 우리 반 아이가 그려준 나, (우)작년 2학년 우리 반 아이가 그려줬던 나
아이들 눈에는 내가 이렇게 보이는구나. 이날 입은 의상과 똑같진 않았지만 원피스 상의 문양을 기억하고 그려 넣은 눈썰미가 제법이다. 동학년 단톡 방에 사진을 찍어 올리며 물었다.
"우리 반 아이가 그린 거예요. 저랑 닮았나요?"
실제 얼굴이 좀 더 갸름하지만 누가 그렸는지 실력 좋다며 선생님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그림이라는 반응 하나. 옷 무늬 디테일이 예사롭지 않다는 또 다른 반응 하나.
"오, 비슷해요!"
라는 누군가의 반응에는 실제의 나보다 훨씬 크게 그려진 '그림 속의 눈'에 많이 찔린다.
누군가를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은 어디에서 생기는 걸까? 나도 다른 사람을 그려본 적이 있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본다. 어렸을 때야 즐겨보던 TV 만화나 순정 만화책에서 본 캐릭터를 따라 그리기를 해 보기는 했지만, 나의 주변 사람을 그려본 적이 있었나. 아이를 낳고 아이들의 변화무쌍한 모습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두 아이를 앉혀놓고 그려본 적은 있었다. 미술을 했더라면 그럴 때 그림 속 아이들의 모습에 담긴 내 마음까지 낱낱이 남길 수 있었으려나.
아이가 그린 그림 속의 나는 어떤 나일까.
공적인 나, 사적인 나, 비밀스러운 나
몇 년 전 봤던 영화, <완벽한 타인>의 첫 화면이었나, 엔딩 장면이었나. 자막에 쓰여 있던 문장 하나.
사람들에겐 세 가지의 나가 있다. '공적인' 나, '사적인' 나, '비밀스러운' 나.
공적인 나의 모습이라면 '대한민국 공립 초등학교의 중견 교사'라는 이름의 나일 테다. 매일 학교로 출근해 아이들을 만나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지내는 나. 최근 몇 년은 내리 2학년 담임만 맡다 보니 어른의 어휘와 아이들의 어휘 간 구분이 모호해진 나. 아이들의 글쓰기 노트 속 틀린 맞춤법을 하도 많이 만나다 보니, 어쩔 땐 무엇이 맞는 맞춤법인지 헷갈리는 나.
예전에 교사 연수에서 만난 유치원 선생님께 헷갈리는 글자의 표기법을 물었더니,
"아이고~ 유치원 교사들한테 맞춤법을 물으면 어떻게 해요."
하셨다. 그 말을 듣고 격하게 공감되어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교사들은 대하는 아이들의 어휘를 갖게 된다. 젊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보통의 대화 속에서도 현저히 반응 속도가 늦어지고 말 중간에 음, 어,, 가 많아지는 것도 무관하지는 않겠다.
사적인 나의 모습이라. 딸이 한 말로 간단히 설명되려나.
"다른 선생님들이랑 학생들이 엄마 이런 모습 봐야 하는데."
'이런' 모습이란, 딸이 추는 유연하면서도 절도 있는 방탄(BTS) 춤을 따라 하다 관광버스 춤을 만드는 재주의 나, 고음 불가에 저음 불가까지, 도대체 얼마나 좁은지 가늠키 어려운 음역대로 불러 젖히는 노래를 부르는 나(보통 혼자 흥에 넘친다), 이제는 남편도 마냥 받아주기 버거워해 너희들이라도 받아주렴, 하고 부리는 반백 엄마의 입 짧은 애교 부리는 나. 뭐, 이런 게 아닐까(사실 저녁 밥상머리에서도 딸에게 "~했떠염." 체로 말했다가 혼났다ㅠ).
사실 딸은 내게 집과 학교에서의 모습이 이중적(?)이라고 말할 자격이 턱없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딸의 담임 선생님과 상담할 때마다 내가 아는 딸과 다른 딸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게 좋다고 말한 사람도 다름 아닌 딸이기 때문이다.
가끔 이상하고, 괴팍하고, 부담스럽고, 조울증 비슷한 증상을 보여도 나를 알고 받아줄 사람들이니까 거리낌 없이 나오는 말과 행동들이 있다. 가족 앞이니까, 나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이니까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거다.
그렇게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들과 공간이 없다면 내부로만 들끓던 숨길을 어떻게밭아낼 수 있을까.
가끔 어련히 알아줄 것이라 여겨 고마움, 미안함, 애정의 감정들을 제때 표현하지 않는다. 적립해 봐야 이자 한 푼 안 붙는 이런 짓을 하는 이도 '사적인' 나다. 오늘도 정작 그런 감정들은 뒷방에 쌓아두고 화, 짜증, 투사 같은 감정들만 쉽게 내뱉진 않았는지.
비밀스러운 나.
가족도 모르고 때론 나 자신도 모르겠는, 그런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아닐 테니 아무도 모르는 나의 뒷모습에서 찾을 수 있으려나.
한참 후배의 승진을 향한 도전에 축하의 말을 전하던 나의 뒷모습,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지만, 과연 믿음대로 흔들림 없이 살고 있나? 문득문득 결혼 전 만났던 그 사람(들?)은 잘 살고 있을까, 이런 생각 하는 나. 이런 게 비밀스러운 나일까?
아니다. 불특정 다수가 보는 공간에 쓸 수 있을 정도가 비밀 일리 없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글로 내어놓을 수 없는 나. 그게 비밀스러운 나인 거다. 그 모습도 나일 테니 잘 끌어안아 가야겠지.
아이들이 그려 준 나는 웃는 모습이다. 적어도 아이들의 눈에는 내가 웃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거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라고 했으니, 그림 속 웃는 나는 행복할 거다. 오늘도 많이 웃어야겠다. 행복해지는 방법, 참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