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벌인 언쟁의 화두, '성인지 감수성'

'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

by 정혜영


남편과 아내는 실로 오랜만에 큰 언쟁을 벌였습니다.

남편이 맛있게 요리한 밥을 먹다가 벌어진 일이라 돌아보니 좀 겸연쩍긴 합니다. 그래도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어린 나이도 아니고 불혹을 지나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알아서 말을 거를 수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닙니다. 사람은 이성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감성(마음)으로 움직이는 존재이니 마음을 건드리는 것에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언쟁의 화두는 '성인지 감수성'이었습니다.

모처럼 부부가 품격(?) 있는 대화를 좀 해보나, 했는데 말싸움으로 끝나버렸으니 부부간에 대화로는 맞지 않는 주제였던가 봅니다. 밥 잘 먹다가 어디서 그 얘기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의 기억과 현장에 있던 딸아이의 기억을 조합해 보니, 남편의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인 듯싶습니다. 원인 제공한 사람에게 좀 더 과중 처벌을 해야지, 싶습니다.

평소에 회사 얘기를 잘하지 않는 남편이 왜 그런 얘기를 꺼냈는지 아내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중년에 접어들며 두 사람 모두 다양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으니 그 쯤 하나려니, 여깁니다.


남편이 들려준 이야기는 회사에서 요즘 '사내윤리위원회'에 회부되는 투고 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투고 건 중, 열이면 열 모두 '성희롱' 건이라고 합니다. 물론 저 사람 저러다 큰일 나지, 싶은 사람도 있지만, 저 사람이 그런 일을? 싶은 사람도 있어서 남자 직원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투의 불만이었습니다. 누구라도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피의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여직원들을 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여직원과 남직원들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은 더 두터워지고 친밀감의 시도는 아예 안 하는 것이 좋다는 취지의 이야기였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정치권과 연예계의 미투 사건을 봐 오면서 누군가는 이제 세상이 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환호했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모종의 이익을 위해 젠더 문제를 부각하려는 의도라고 불편해했을 수도 있었을 테죠. 아내 역시 그 어디쯤에서 과거와는 분명 다른 시대를 맞이하고 있음을 체감했던 것 같습니다.


동시대를 살아온 남편의 입장이 이해되면서도 20대 때부터 직장 생활을 해 온 여성의 입장으로서 남편의 의견엔 반박할 부분이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남편은 오히려 여직원들에게 까칠할 사람이라 그것이 오히려 걱정이지, 친절해서 걱정이 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남편은 오늘 남편답지 않게 격양된 모습이었습니다. 평소에 자신에게 까칠하게 대하는 태도에 반감을 가진 여직원에게 사소한 말이나 행동 하나로 오히려 되치기 당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며 분을 삭이는 남편의 모습이 아내는 좀 낯섭니다. 그래도 남편이 걱정하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 아내는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상대가 '여직원'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출발입니다.

상대방의 평소의 태도에 부당하다거나 모욕감을 느껴 반감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남녀 문제를 떠나) 직장인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니까요. 반감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성희롱으로 걸고 넘어갈 수 있는 '여직원' 관련 문제가 아니라, 작은 꼬투리를 잡아 벼랑으로 모는 '상식적이지 않은 이'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부류의 인간은 어느 집단에서건 하나쯤 존재하기 마련이고요. 물론 그 사람이 여자일 수는 있습니다. 세상에 비상식적인 여자들도 있고, 남자도 있겠지요.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과 부딪히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말이죠.


남편은 요즘 가끔 회사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있습니다. 대체로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무조건 남편 편을 들어주어야 맞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 마음이 건드려지면 그게 잘 안됩니다. 이번 문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언급하던, 아내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젊은 여직원들의 얼굴에 아내의 20대 때 얼굴이 오버랩되니, 무조건 남편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속한 '학교'라는 조직이 비교적 수평적인 관계가 잘 유지되는 집단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20대 때에는 요즘 시대와는 또 다른 분위기도 엄연히 존재했던 게 사실입니다. 상대적으로 남자 직원이 많은 시골 학교에서 젊은 여교사가 겪고 싶지 않았던 귓불 달아오르는 이야기들이 분명히 존재했으니까요. 왠지 정색하면 분위기를 흐리게 될까 봐 참거나 외면했던 상황들 말이죠. 서로 어느 정도 조심하는 교직 사회에서도 그럴진대, 일반 회사에 다녔더라면 어떠했을까요. 그래서 아내는 얼굴도 모르는 그 여직원들의 편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남편은 자기(의 인간성)를 잘 아는 아내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 게 화가 났던가 봅니다. 그녀들을 대변하는 듯한 아내의 말에,

"00같이 말하네."

하며 특정 남성 혐오 집단의 이름까지 언급한 걸 보면 말입니다. 그 말에 아내 역시 감정적이 되어 둘의 언쟁은 모처럼 큰소리로까지 번지고야 말았습니다. 동시에, 서로가 멈출 타이밍임을 직감하기도 했을 테고요. 부부가 20년 가까이 살다 보면 '멈출 타이밍'을 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더 이상의 감정 소모는 서로에게 득 될 것이 없으므로 휴전 모드로 전환했지만, 아내의 생각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집 밖에서 걷기를 하며 아내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봅니다. 자신의 들끓는 감정이 남편이 아내에게 한 말에 대한 '분'에서 비롯된 것인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서로 합일되지 않은 지점이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인지.


딸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옵니다.

"엄마, 어디야?"

"맨날 걷는 길."

"알았어."

하더니 돌아가는 길에 딸이 마중 나와 있습니다. 딸과 좀 긴 이야기를 나누며 아내는 딸을 통해 언쟁을 벌인 엄마 아빠의 모습을 객관화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한 말, 아빠가 기분 나쁠만하게 들렸어."

"그래? 엄마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아빠가 엄마한테 한 말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엥? 아빠가 뭐라 했는데?"

"00같이 말한다고 그랬어."

"뭐? 진짜?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고? 그건 아빠가 잘못했네! 그건 절대 그냥 넘어가지 마. 꼭 사과받아."


아니, 이건 뭐지요? 아내는 지금 중2 딸에게 상담하고 위로받고 있는... 중인 게 분명했습니다. 딸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긴 했지만, 집에 돌아와 남편 얼굴을 보니 또 금세 삭혔던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문 닫고 들어가 있으려니 잠시 후 남편이 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옵니다.

"별 일 아닌 일로 우리가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기분 풀자."

라고 운을 떼며 남편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밉니다. 갈등 상황 후 화해를 먼저 신청하는데도 분명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아내도 이미 들끓던 기분은 가라앉은 상태이기도 하고 말이죠. 서로가 차분한 분위기가 되자 아내와 남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갑니다.


시대가 달라졌음을 직시하자고. '얼평(얼굴 평가, 외모 평가)'은 직장에서는 절대 금지하자고. 여자 대 남자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관점으로 서로를 보자고. 그리고 직장 동료 하고는 친밀하려고 애쓰지 말자고. 격려하고 독려할 수는 있지만 친해질 것까지는 없다고. 특히 남녀 동료 지간에는.


판단이 흐려지는 애매한 상황에서는, 무조건 약자 편에서 판단하면 된다고. 그건 성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약자들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문제라고. 성소수자와 노인, 여성, 아이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 계급 하층민들의.

지금도 그렇고,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우리 누구라도 그 어디쯤에 속할 수 있는.




가끔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여자라고 다 약자가 아니며, 남자라고 피해자가 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요. 권력관계를 떠난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모호한 집단이라면, 아내는 그냥 '성비 비율'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남편의 회사에서는 남자가 더 많으니 여직원들이 약자의 입장일 테고, 아내 학교에서는 여교사들이 더 많으니 남교사들이 상대적 약자의 입장일 수 있을 거라고.

좀 더 강자인 '인간'의 입장에서 약자인 '인간'의 입장을 생각하고 보호하며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강자/약자가 항상 정해져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아내가 중2 딸로부터 위안을 받은 것처럼 말이죠.



아! 넘어가면 안 될 문제를 깜빡했네요.

"아까 나한테 00 같다고 한 말, 사과해!"

"자기도 나한테 사과 안 했잖아!"

"아까 그 부분은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거든!"

"그래. 나도 그렇게 말한 거 미안해. 진짜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아내는 다음부터 밥 먹을 때 만은 예민한 문제는 피해 가야겠다, 고 마음먹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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