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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고 싶은 나

by 정혜영


얼마 전, 페이스북에 연동된 나의 글에 대학교 동창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그 글이 여러 가지 모습의 나를 돌아보는 내용이어서인지 그 옛날(?) 대학생이었던 나를 떠올리며 나에 대한 기억을 써 놓은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대학생 000

그렇게 넉넉한 집 아이는 아닌 것 같았음. 잘 사는 집 여대생들의 옷차림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그냥 청바지에 티셔츠 정도 입고 다녔으니까. 잘 사는 애들은 원피스나 유명 메이커 옷을 주로 입고 다녔으니까. 그런데 항상 웃고 다녔음. 공부를 엄청 좋아한 것은 아닌 것 같았음. 놀 때는 확실하게 놀았음. 남자애들이 장난을 걸면 잘 받아쳤음. 뒤로 빼는 성격은 아니었음. 적극적인 성격. 평소 농담 좋아하고...


내용이 칭찬 일색이면 기분이 더 좋았겠지만, 한 사람을 기억 속에서 소환해 주는 정성은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정도로 나를 떠올려준 친구가 진심으로 고맙다.


그래도 내용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대부분 맞는 말이지만 '공부를 엄청 좋아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는 대목은 친구 기억의 오류다. 시험 보는 강의실에 턱걸이로 들어와 시험지에 이름만 쓰고 제일 먼저 나가 성적표에 쌍권총을 쏘아대던 친구야, 그때 우리 나이에 공부 좋아했다면 그게 정상은 아니지 않았..겠지? 진실은, 내가 공부를 좋아하지 않은 게 아니라 공부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거란다.


시험만 보면 F학점을 달고 다녔던 그 친구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그의 단짝 친구. 세월이 흘러 두 친구들의 삶을 전해 들으면 참 신기하고 대견하다. 그 친구는 학원 원장을 하며 사교육계에서 배움을 전파하고 있고, 친구의 친구는 중등 임용고시에 합격해 중등교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모두 미래에 어떤 삶을 살아갈지 한 치 앞도 모른 채, 찬란했던 시기를 만끽했던 젊음들이었다.


친구가 상기시켜 준 대학생이었던 나를 돌아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특히 나도 잃어버린 나를 찾아줄 때는 더욱.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서도 있는 집 여대생들에게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의 나가 그리웠나 보다. 그 시절엔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을 시간도 없었다. 여유 없던 젊은 시절의 나가 조금 애달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항상 웃고 다녔다니, 그 시절 일상의 행복을 놓치지 않았던 나가 기특하다.


한 친구의 기억 속 모습이 내 20대의 전부는 아니다. 그래도 친구의 기억은 젊은 시절의 내가 타인의 시선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는 증빙 자료 같아 귀하다. 그 시절 이후의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온 것 같다. 직업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했을 때도, 취업 후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교사라는 페르소나로 20년을 지내오면서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 기억 속의 나는 타인의 기준과 잣대로 재단된 채 절반의 나로 남게 되었다.


문득, 나를 되찾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가진 것이 없어도 항상 주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어 반짝일 수 있었다. 원치 않아도 젊음이 주인공을 꿰차게 해 주는 것이 사회의 미덕인지도 모르겠다.

나에 대한 타인의 시선이 잦아들 때, 그때는 자신이 자신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줄 때다. 별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자체 발광하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긴 하다. 자연스럽게 빛나던 외면의 아름다움이 사라졌으니 이제 그동안 관심 두지 않았던 내면에 있던 나를 끌어낼 때다. 오랫동안 외면의 아름다움에 밀려 기 한번 펴보지 못했던 내면의 나 말이다. 내면 아이는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드러나기를 두려워한다. 내면 아이를 자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모습인지 다 알지도 못한다.


이제는 내면 아이를 자주 꺼내보려 한다. 진짜 나를 마주하는 일은 설레기도, 두렵기도 한 일이다. 더러 당황스러운 나이거나 불만스러운 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습들도 다 나다. 오히려 못난 나일 수록 더 아껴줘야 괜한 심술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받지 못한 자아는 시기와 질투로 다른 좋은 나를 괴롭힐지도 모르니까.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의 변신에 동의할 때 비로소 우리는 내적으로 활짝 열린다. 그리고 그 넓은 통로로 삶에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게 한다.

-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본문 중, 나탈리 크납


이전에 나라고만 여겼던 나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새로운 나가 그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생긴다. 내가 아는 나일 수도, 내가 모르는 나일 수도 있다. 내가 모르는 나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나의 모든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나를 둘러싼 세계를 진심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나라야 세상을 사랑할 자신도 생긴다. 그게 내가 되고 싶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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