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체성'을 잃은 단감의 단맛

by 정혜영


가을을 대표하는 과일은 뭐니 뭐니 해도 '감'이다. 슈퍼마켓에 갈 때마다 매대에는 두 종류의 감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폭 들어가며 보드라운 속살을 쭉 내어놓을 것 같은 '연시'와 뾰족한 것으로 눌러도 어림없을 것 같은 '단감'이 그것들이다. 부드러운 단맛의 연시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난 단단하여 아삭하게 씹히는 맛을 지녔으면서도 연시나 홍시와는 다른 싱그러운 단맛을 가진 단감이 더 좋다.


과일 귀신들인 우리 집 식구들이 조리대 위에 놓인 단감 10개를 며칠 째 못 본 채 한다. 먹고 싶어도 깎아먹기엔 귀찮아하는 못된 버릇(?) 덕에 오래가는 것이다. 버릇을 고쳐주고 싶지만 또 맛있게 먹는 모습도 보고 싶은 마음. 이러니 엄마들은 자식들의 못된 버릇을 잘 고치지 못한다. 감을 깎아놓고 식구들에게 먹으라고 소리치니 득달같이 달려와 한 접시를 뚝딱 해치운다. 이 모습을 보려고 엄마들은 찬을 만들고 과일을 깎는 것이다.


단감은 물렁해지기 전에, 단단할 때 먹어야 최고 맛나요 by 네이버 이미지


감 절반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더 깎으려고 한 개를 더 집었더니 표면이 물컹하다. 아고, 아끼다 똥 된다고 하나하나 골라서 담은 것 중 이미 익어버린 감이 생긴 것이다. 물컹해진 단감은 깎기도 어렵고 맛도 없다. 고를 때는 색깔과 모양을 비교해 가며 신중하게 담았던 것들인데, 익히는 바람에 타고난 맛을 변질시키고 말았다.

그렇다고 상한 것도 아닌데 버릴 수도 없어서 손가락으로 흘러내리기 일보 직전인 상태까지 되어 버린 감을 대충 깎아 서둘러 입에 넣었다.

과연 다른 단감들과는 다른 맛이다. 유명을 달리한 단맛이랄까. 굳이 분류하자면 단맛과에 들어는 가겠으나 달리 다른 맛에 분류할 수 없어 어찌할 수 없이 끼워 넣은 맛. 단맛이기는 하나 맛없는 단맛. '정체성'을 잃은 단맛이었다.


직장에서 내 몫으로 나온 샌드위치나 떡을 보면 언제나 그것을 좋아하는 이가 먼저 떠오른다. 샌드위치는 아들이, 떡은 딸이 떠오르는 것이다. 즉석에서 먹어야 가장 맛있을 그것들을 더 맛있게 먹을 이들이 떠올라 가방에 챙겨 넣는다. 퇴근길에 사다 주어도 될 텐데, 갑자기 생긴 간식만큼 절실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러다 퇴근길에 이런저런 일을 보고 저녁 준비, 식사를 하다 보면 가방 안에서 애타게 용도를 찾는 그것들을 까맣게 잊고 만다. 결국 가방 안에서 며칠을 묵히다 발견된 것은 그것들이 더 이상 쓸모가 사라진 후다. 썩지 않을 때 발견만 해도 다행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맛있게 먹을 걸. 뒤늦은 후회를 하지만, 머리와 마음은 따로 놀아 같은 상황이 생기면 또 마음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한다.

누군가의 입맛을 안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 일이다.


세상 만물에는 '타이밍'이 있다.

홍시는 물렁하게 익어야 맛이 들지만, 단감은 단단할 때 가장 맛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기가 맞아야 사랑은 결실을 맺으며, 시기를 놓친 사과는 효력이 떨어진다. 자식은 부모 손안에 있을 때 마음껏 품어주되, 언제까지 부모가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 자리 잡으면, 안정되면, 여유 있어지면... 하며 가족과의 시간을 유예하다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가장의 모습은 얼마나 애처로운가. 다른 이가 나를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어야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외롭지 않다. 맛이 들고 깊어지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러다 너무 많은 것들이 떠올라 당황스럽다. 10월도 중반이 넘어가는 이 시기에 뒤늦게 업무와 관련하여 떨어진 예산 폭탄처럼 세상 밉살스러운 존재가 되면 안 되겠다. 최고의 쓸모가 있으려면 최고의 시기와 만나야 한다. 주저하다, 묵히다, 기다리다 시기를 놓치면 애매한 표정을 짓는 일만 생긴다. 정체성을 잃은 단감을 맛볼 때처럼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소피 마르소의 앞머리를 하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