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한 젓가락의 의미

어쩌다 밖에서 밥을 먹어야 할 때, 주변 식당들의 음식에 대한 맛 정보가 없을 때, 돈 주고 사 먹고 후회하지 않을 단 하나의 메뉴를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나의 선택은 '라면'이다. 떡국떡을 넣어도, 치즈를 넣어도, 계란 탁, 파 송송 넣어 먹어도 좋지만, 면발의 식감만 꼬들꼬들 살려 끓여낸다면 아무것도 넣지 않아도 좋다. 이것저것 넣어 배보다 배꼽이 커지느니 아무것도 넣지 않은 라면 맛이 오히려 깔끔하다.

황금 비율인 라면 수프는 그 하나만으로 맛에 혁명을 일으키니 아무것도 없는 정글, 식재료를 잡아 요리해 먹던 TV 프로그램에서 라면 수프 하나를 얻기 위해 멤버들이 그토록 사력을 다했겠지.

누군가는 영양가 없는 각종 조미료에 나트륨 과다를 우려하겠지만, 외식이 귀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라면은 적은 돈으로, 집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어린 시절, 베이지색 모자와 유니폼을 입고 한동안 요구르트 배달 일을 하러 다니셨던 엄마가 집에 계시지 않는 동안 동생들을 건사해야 했던 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오랜 시간을 보냈을까. 엄마가 돌아오시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엄마가 들고 오신 라면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때 처음 만난 라면이 '팔도라면'이다. 어린 시절엔 요구르트와 라면의 상관성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한국요구르트가 처음으로 라면 사업을 론칭한 브랜드가 '팔도라면'이었다). 그저 엄마를 기다리던 시간에 대한 보상 심리까지 얹혀 그냥도 맛있는 라면은 세상 무엇보다 맛난 천상의 음식이 되었다.

엄마가 적당한 물 양으로 보글보글 끓여 내어 주신 라면은 한창 클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한 그릇으로 부족했다. 라면은 면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국물에 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먹을 수 있는 확장성이 고마운 음식이었다. 국물이 있어 두 개만 끓여도 우리 네 식구가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던 먹거리.

다른 음식 때와는 달리 내 몫으로 담긴 라면 한 그릇을 나눠주어야 할 때 난 너무 싫었다. 동생들은 언제나 후다닥 먹고 나서는 남아 있는 사람의 것을 탐했다. 각자 나눠 준 그릇은 개인의 몫이니 조금씩, 오래, 아껴 먹는 내 그릇엔 매번 제일 늦게까지 내용물이 남아 있곤 했다. 동생은 내 몫을 자주 욕심냈다. 그럼 엄마는 언니 몫을 탐내는 동생에게 퉁을 주면서도 쉬 나눠주려 하지 않는 큰 아이의 야박함에도 노여워하셨다.

억울할 노릇이었다. 내게 주어진 몫을 그저 아껴 먹었을 뿐인데.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결국 내 그릇에서 라면 몇 젓가락을 얻어가고 나서야 만족해하던 동생이 그렇게 미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미 엄마의 그릇에는 남은 라면이 없었을 텐데...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다. 자식들에게 라면 한 그릇조차 넉넉히 먹이지 못하는 어미의 심정까지는.

그때의 기억이 남아서일까.

나는 식탐이 특별히 많지도 않으면서 내 몫으로 끓인 라면을 탐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너그럽지 못하다. 언젠가 안 먹겠다고 하여 하나만 끓여낸 라면 냄새를 맡고 달려와 한 젓가락 먹었다가 봉변을 당한 남편은 몹시 억울해했다. 고작 한 젓가락 먹은 게 그 정도로 화 낼 일이냐며. 남편은 몰랐을 것이다. 라면 하나에 집착하는 내 옹색한 마음에 나도 몹시 화나 있었다는 것을.

그러다 모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정신과 의사가 '지나치게' 긍정적인 성향을 지닌 내담자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건너뛰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을 보았다. 제대로 수용받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은 자연스럽게 해소되지 못하고 쌓인다. 계속 쌓아두면 해롭기 때문에 나의 몸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방어기제를 세운다. 그중 하나가 '구강 감각'을 통한 감정 완화다. 구강을 통해 음식을 맛보고 씹는 행위에서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완화하려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이 올라올 때 억누르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회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라면 한 그릇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내어 놓고 마음껏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그러니 내 라면 그릇에서 한 젓가락 뺏어가는 사람에게 마음껏 화를 내어도 괜찮다. 그가 가져간 것이 단지 라면 한 젓가락뿐이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단지 한 젓가락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by 해피아이앤깡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