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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an 04. 2022

겨울 산의 '오늘의 말씀'


영하 10도를 밑도는 한파주의보로 한 주, 눈이 내려 미끄러워진 설산(雪山)은 부상의 위험이 있다고 또 한 주. 2주간 산행을 못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역시 나를 움직이는 힘은 목표의식이나 계획성이 아니라 몸에 밴 '습관'이다. 2주를 넘기고 3주 차 일요일이 다가오니 이제는 북한산이 못 참고 "날 보러 와요, 날 보러 와요오오~"하고 신호를 보내왔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리라. 전날 밤, 비장하게(?) 일찍 잠자리에 들며 다음날 북한산과의 3주 만의 상봉에 미리 가슴 설렜다.


아침에 일어나 바깥을 내다보니 언제 내렸는지 밤 사이에 내린 눈으로 천지가 하얗게 덮여 있었다. 함박눈은 아니었지만 정작 산행보다 눈길 운전걱정이었다. 도로가 미끄러우려나? 제설작업은 되어 있겠지? 아이젠을 준비해야 할까? 남편에게 눈이 내렸음을 알렸다가는 또 가면 안될 이유를 나열할 테다. 모르게 움직이자. 조용히.


다행히 부지런하신 분들의 이른 제설작업으로 도로는 운전에 무리가 없었다. 누군가의 일상의 편안함은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있기에 가능하다. 눈 온 뒤 도로 사정을 걱정하지 않도록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라디오에서 들려는 새해를 여는 추천 시 낭독에 아침부터 귀호강이다. 집안에만 있었다면 못 누렸을 도로 위의 사치스러운 호사를 맘껏 누린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아직 살지 않은 최고의 날들 중 하루를 살아내고 있으니 마음껏 호사를 누려도 좋겠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때라니, 이동을 앞두고 다음 학교에 대한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내게 주는 오늘의 교훈이다.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알 수 없는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 말고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할지어다. 아등바등한다고 삶은 결코 내 뜻대로 흘러가지지 않을지니.


생의 진리를 설파하는 시로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은  낭송 후 흘러나온 '볼 빨간 사춘기'의 '여행'이라는 노래에 다시 폴폴 헤집어진다. 나도 노래 가사처럼 한 마리 새처럼 런던, 파리, 뉴욕으로 날아가고 싶다.


볼빨간 사춘기, '여행'


4년 전이었던가. 딸과 둘이 떠난 여행 중 올랐던(당연히 케이블가로) 스위스 알프스 산맥 중 하나인 쉴트호른. 그곳에서 만난 대자연의 감동에 다시 유럽에 온다면 스위스에서부터 시작하자 딸과 약속은 요원하기만 하다.


여행의 기쁨이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남으로써 생기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일상을 제삼자의 눈으로 관조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한, 두 발 떨어져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두 발 딛고 서 있는 어떤 곳도 여행지가 될 수 있겠구나.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부추기는 노랫말로 마음은 어느새 런던을, 파리를, 뉴욕을 향해 날아다닌다.  


추워진 날씨에 눈까지 내렸으니 북한산에도 등산객 수가 현저히 줄었다. 눈이 살짝 덮인 산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내딛는 발길. 정직한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위엄을 지닌다. 그 앞에 오만했다간 큰코다친다. 그래도 눈 덮인 계곡과 산길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수시로 이 나간다. 살얼음 사이로 쫄쫄쫄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귀가 청량해진다. 겨울 산은 다른 계절과는 비할 수 없는 클래스로 아름다움을 뽐낸다.   


살짝 눈으로 덮인 운치 가득 겨울 산 by 정혜영
꽁꽁 언 계곡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어 보세요. by 정혜영


30여분 오른 지점부터 살짝 데워지는 기운에 외투를 벗을까, 말까 고민할 때쯤, 내 앞에 가던 등산객과 걸음이 바짝 가까워졌다. 다소 늦은 그분의 발걸음에 내 속도도 늦춰졌다. 눌러쓴 털모자 밑으로 새어 나온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발걸음 속도와 느긋한 몸의 움직임, 하얗게 내려앉은 머리카락으로 나이 짐작다.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70대 초반 정도 되셨을까.

넓지 않은 길이 했지만, 마음먹었다면 먼저 앞질러 갈 수 있다. 그런데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보다 오래 세상을 일궈오신 삶의 선배님의 앞길을 어쭙잖게 앞질러 가고 싶지 않았다. 정성 들여 내딛는 그분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뒤따라 걸었다.

추월은 서로 간의 간격도 중요하지만, 앞서가던 이가 양보와 배려의 마음으로 길을 내어줄 때 더 조화롭고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조금 더 넓은 구간에 이르자, 앞서가던 그분은 잠시 옆으로 길을 내어 주셨다. 무리하지 않고도 등산객들의 산행은 조화롭다.


추워진 날씨 탓인지 원효봉 정상의 냥이 4마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냥이들은 어디에서 이 추운 겨울을 나게 될까. 가뜩이나 등산객도 줄어든 이곳에서 냥이들의 겨울나기가 더 혹독지 않을 걱정이다. 무탈하게 이 겨울을 버티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문을 열고 세상과 마주해야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쨍한 새벽 공기, '통행 가능'을 알려주는 앞사람이 밟고 간 눈길, 희끗한 노년의 욕심내지 않는 결기, 차가운 얼음 사이로 흐르는 청명한 계곡 물소리...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과 시간, 사람들 속에서 마주하는 세상은 얼마나 실제적이고 체험적인가.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는 대게 실제로 만나는 세상이 아니라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뉴스나 각종 SNS에서 기인한다. 듣고 싶지 않은 소식에 귀가 시끄럽고 볼썽사나운 광경에 눈이 따끔거릴 때는 천천히 산에 오르라. 

겨울 산이 우리에게 주는 '오늘의 말씀'이다.


겨울 산, 어지러운 세상을 잠시 내려놓는 시간. by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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