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영 Nov 21. 2021

북한산의 '빅피처'


요일마다 오르는 북한산 '원효봉'이 이제 슬슬 물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1시간 30분 걸려야 오르던 길이 1시간 내로 단축되자 내 눈은 다시 백운대로 향했다. 한 번 도전했다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발에 쥐가 나는 바람에 아쉽게 돌아서야 했던 곳.


관련 글) https://brunch.co.kr/@gruzam47/219


이제 때가 되었다. 백운대를 다시 만날 때가. 다시 올라야겠다고 생각하니, 끝날 것 같지 않던 비탈길을 이를 악물고 올라야  그 깔딱 고갯길의 고통이 다시 떠올랐다.


둘째 출산에 임박해서도 그랬다. 밤새 주기적으로 진통만 하다 하루를 꼬박 새우고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분만실로 이동하던 그 순간에 첫 아이 출산 때의 무시무시했던 고통 순간, 떠오르는 것이었다. 가장 큰 고통의 기억은 때가 임박해떠오르게 하심이 신이 인간에게 주신 배려일지 모른다. 고통의 시간을 최소한으로 해 주려는 배려. 덕분에 고통의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출산이 이루어졌으니 고통의 순간 뒤엔 반드시 평온의 시간이 찾아왔다.   


백운대로 향한 마음은 잊고 있던 당시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 다시 또 쥐가 나면 어떡하지? 왼쪽 손목 염증이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닌데 괜찮을까? 왕복 4~5시간 코스를 홀로 오르다 부상당하면? 항상 무엇인가 나를 넘어서야 하는 일과 마주할 때마다 일어나지 않은 근심과 걱정은 '원 플러스 원' 상품처럼 따라 왔다.

"손목도 안 나았는데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가지 마."

남편이 하는 걱정 말도 하지 않을 이유 쪽 추에 무게를 더했다.

이럴 때 하지 않는 쪽이 쉬울까, 하는 쪽이 쉬울까? 하지 않는 쪽이 쉬울 듯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걱정과 근심, 누군가의 조언으로 포기한 일은 두고두고 미련을 남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꼭 안 해도 될 일인데, 계속 생각난다면 그건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이다.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은 하는 게 더 쉽다.


일단 가기로 마음먹으니 일요일 아침 산행을 준비하는 마음이 바빠졌다. 커피믹스도 2개나 털어 넣어 카페인의 농도를 높였다. 매주 일요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곳에 주차하고, 같은 코스를 등산하는 나는 영화 '프리 가이'의 라이언 레이놀즈처럼 비디오 게임 속에서 일상을 반복하는 캐릭터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늘 나의 목적지는 매주 가던 원효봉이 아니라 '백운대'이지 않. 프리 가이처럼 아무 의심 없던 일상을 벗어나 반란을 도모 중이지 않은가.


등산 초반부터 힘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 막판 스퍼트를 어디쯤에서 내야 할지 안다는 것은 참 안심되는 일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대비할 수 있으니까.

삶도 앞날을 내다볼 수 있어 미리 대비할 수 있다면 조금은 더 안심하며 살아수 있을까. 아니다. 나의 최애 영화 '컨택트'에서 루이스(에이미 아담스 분)도 미래와 현재, 과거의 시간대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가슴 아플 미래를 그대로 선택하지 않았나. 미래가 가진 불확실 우리는 더 희망적으로 만든다누가 말했던가.


(왼) 오늘 하루는 '반란'을 도모합니다 by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오)슬픈 미래일지라도 사랑과 행복도 함께이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by 유니버셜 픽처스


북한산성 입구에서 보리사에 이르는 길은 이제 거짓말을 보태면 눈을 감고도 훤하다. 영화 '프리 가이' 속 라이언 레이놀즈처럼 일탈을 도모하는 지점은, 원효봉과 백운대로 갈리는 이정표 앞이었다.

40여분 올라오는 동안 몸은 이미 충분히 데워졌지만, 이정표 앞에 이르니 심장이 뛰었다. 오늘은 매번 가던 '원효봉' 이 아니라 '백운대' 쪽이다.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는 일탈 앞에서는 언제나 가슴 뛴다. 잠시 숨을 고르며 물을 마시고 장갑을 꺼내 양 손에 꽉 끼우고 신발 끈을 조였다.

"여기서부터 길이 빡센가 봐."

내 앞쪽에서 잠시 쉬고 있던 남자 일행 중 하나가 다른 일행에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려왔다. 내 모습이 그렇게 비장해 보였나?이제부터 진짜 '빡센' 길 시작이니 단단히 각오하시라, 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저들도 곧 온몸으로 알게 될 것이니.


그 지점으로부터 한 시간이 넘는 시간, 깎아지른 돌길을 오르는 동안 욕심은 버렸다. 백운대가 나를 받아준다면야 더없이 기쁘겠지만 지난번처럼 발에 쥐가 나는 등의 예상치 못한 일은 언제든 생길 수 있다. 욕심을 내지 않는 대신, 간간히 잠시라도 발을 풀어주어 근육의 긴장이 지속되지 않도록 했다.

내 힘으로 조절 가능한 부분은 최대한 살피되, 결론은 순리에 맡긴다. 등산을 삶에 비유하는 이유일 것이다.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은 깔딱 고개를 지나 백운대 정상을 얼마 남기지 않은 암벽길에 당도하자, 지난번 다리에 쥐가 났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둘째 출산 직전, 출산의 어마어마한 고통이 한 번에 몰려오던 것처럼.

크게 숨을 내쉬고 발목을 살살 돌려가며 근육을 다시 한번 풀어주었다. 여기까지 잘 올라왔어. 얼마 안 남았네. 조금만 힘 내줘. 그렇게 발목을 달랬다.


백운대에 오르려면 꼭 거쳐야 하는 암벽길까지 무사히 거쳐 드디어! 결국! 오늘은 백운대가 나를 받아 주었다!

정상에 올라 인증샷까지 찍으니 감개무량했다. 짙은 미세먼지로 청명한 풍광은 눈에 담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오늘 다 안 보여주는 것은 다음에 또 만나자는 북한산의 '빅피처'일지 모른다.


여성, 특히 결혼한 여성, 더욱이 나이 든 여성에게 돌아올 기회는 다고, 사회 시스템을 원망하곤 했다. 그러나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편견과 선입견 테두리 안에서 나를 한계 지은 사람은 결국 나였다. 여자니까 그만큼만 해도 된다고. 남편에 아이까지 있는 여자가 뭘 그런 일까지. 나이도 있는데 꼭 이런 일까지 해야 하냐고. 결국 나를 주저앉히던 내 안의 나.

그래서 기쁜가 보다. 행복한가 보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은 조금 더 용기를 내 보아서. 어제의 나를 넘어서는 오늘의 나는 언제나 기특하다. 수고했어, 오늘의 나.


'오늘 잘 왔어. 다음에 또 와. 그때 더 보여줄게.'

북한산의 빅피처는 나를 또 북한산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백운대가 받아줘서 올랐네요^^ by 그루잠





매거진의 이전글 원효봉 냥이가 준 해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