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미터 달리기에서 결승점을 몇 미터 앞에 두고 넘어진다면, 최선을 다해 준비한 중요한 일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몸이 말썽이라면, 공들인 일이 뜻하지 않은 일로 위기상황에 놓인다면 안타까운 노릇이다. 때로는 분할 수도 있다.
지난주 일요일, 큰맘 먹고 백운대를 목표 삼아 오른 산행에서 그런 기분을 맛보았다. 매번 왕복 2시간여 정도로 오르내리던 무리하지 않는 산행. 백운대를 향하는 쉽지만 먼 코스와 가깝지만 가파른 코스를 가리키는 이정표 앞에서 매번 내가 택한 길은 '쉬운' 코스였다. 팔팔한 20대도 아니고 지리산, 설악산을 종주할 것도 아닌데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일요일마다 하는 산행을 길게 하려면 욕심부리며 몸 쓸 필요 없다는 마음의 소리가 언제나 우세했다.
언제나 이정표 앞에서는 고민이 되지요 by 그루잠
그런데 그날은 매번 나를 쉬운 방향으로 이끌던 이정표를 본 순간! 그냥, 갑자기, 백운대 정상에 오르고 싶었다. 점점 하고 싶은 것도, 재밌는 것도, 웃을 일도 많지 않은 불혹의 끝자락에 마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면 의심하지 말고(불혹!) 따를 필요도 있다.
그렇게 오르기 시작한 백운대를 향한 거침없는 산행.
거친 돌길과 끊임없이 위로, 위로만 오르기를 2시간 10분여쯤. 이러다 죽겠다, 생각이 들 때쯤 드디어 백운대의 화강암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을 둥, 살 둥 겨우 올라왔는데 백운대를 오르기 위한 필수 코스인, 밧줄 타고 올라야 하는 길목은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연휴 끝 맞이한 주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 한 맺힌 사람들이 모두 북한산으로 모였는지, 명절 스트레스를 풀려는 며느리들이 모인 것인지 남녀노소(인종마저) 가릴 것 없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해 산행을 했는데 산 꼭대기에서 바글거리는 사람 떼를 만날 줄이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눈앞에 보이는 정상 끝까지 올라 그간 해온 연습용(?) 산행의 결실을 보리라.
차례를 기다려 밧줄을 잡고 화강암 바위를 낑낑 대며 오르며 저 발아래 놓인 산새와 조그만 절, 멀리 아파트 단지들을 내려다보니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현타(헌실자각타임)가 왔다. 바윗길을 오르는 길은 외길이라 돌아갈 수도 없는데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서 돌아 나올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눈 질끈, 감고 올라 조금 평평한 곳에서 다음에 오를 길을 살피는 순간! 왼쪽 발 근육에 쥐가 나고 말았다. 근육이 꼬이는 듯한 고통에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악, 소리를 틀어막고 발 끝을 잡아당기며 과수축된 근육이 풀어지기만을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가끔 집에서도 근육 경련이 오면 풀리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곤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길어질까 봐 걱정이 되었다.
정상을 코 앞에 두고 근육 경련이 오다니, 분했다. 조금만 올라가면 정상인데... 결국 정상을 200~300미터 남겨두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쥐가 나면 또 나기가 쉬워 욕심을 부리다 다시 문제가 생기면 119에 전화할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그날도 정상을 향해 헬기가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정상에 오르면 끝날 일이 아니었다. 최소 2시간 이상 걸릴 하산길을 고려하지 않았다간 괜한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근육 경련이 왔던 왼발보다 오른발을 더 많이 써서 하산했다. 상행보단 하행 시간이 덜 걸리기 마련인데 한쪽 발에 의지하여 조심하며 내려오다 보니 올라갈 때 걸린 시간만큼 걸려 내려왔다. 그래도 내려오는 동안 발에 다시 경련이 오지 않은 것만도 감사히 여겨야 했다. 북한산성 초입에 당도하자 풀린 긴장 탓인지 절로 깊은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번 주는 어떤 길로 올라볼까?
이정표 앞에서 망설임 없이 쉬운 코스로 발길을 내딛던 나는 이제 이정표 앞에서 고민한다. 한 번 큰 고난을 겪어본 사람은 비슷한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바로 설욕의 장에 뛰어들지도 않는다.
이번에는 아예 다른 코스를 올라보기로 결정했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둘레길 쪽을 통해 원효봉에 올랐다. 지난주에 가파른 백운대 코스를 올라보지 않았더라면 그보다 한참 낮은 원효봉 길도 버거워했을 것이다. 평지가 거의 없이 위쪽으로 오르기만 하는 코스는 백운대 경로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둘레교에서 출발해 내시묘역 갈림길을 지나 서암문(시구문)을 거쳐 오르는 원효봉 코스는 자연적인 돌길이 아니라 사람 손으로 쌓아놓은 듯한 돌길이 인상적이다. 힘겹게 오를 누군가를 위해 수고해 준 손길들이 고맙다.
돌길을 쌓아 준 손길, 감사합니다~^^ by 그루잠
의도치는 않았지만 원효봉 정상에 오르니 백운대를 코 앞에 두고 내려와야 했던 분함이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원효봉 정상에서 만난 냥이 형제들이 해답을 주는 것 같았다.
"수고했어. 살다 보면 오르는 날도 있고, 못 오르는 날도 있는 거야. 성공하진 못했어도 마음먹은 데까지 용쓰며 올라봤던 경험이 오늘 너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거야. 그걸 잊지 마. 냐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