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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Sep 18. 2022

문수봉에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다


명절이 지나면 온라인상에 주부들의 성토가 넘쳐난다. 명절 전부터 서서히 예열되기 시작하여 명절 직후에 터뜨리는 분화구에서 분출 열기에 덴 가정이 꽤 됐을 거다(우리 집이 그랬다는 건 아니다^^).


산행의 장점이야 나열하려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명절 증후군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등산이지 않을까 싶다. 평소보다 좀 더 힘든 코스로 다녀오면 내 몸 여기저기 쑤신 게 명절 내내 부엌에 서 있느라 그런 건지, 바위산을 네 발(두 손까지)로 오르느라 그런 건지,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수고한 나를 위로하는 날이어야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 전날 밤 등산복과 등산가방을 챙기는데, 데이트 전날 의상을 고를 때처럼 은근히 설레기까지 했다. 이번에 더 설렌 건, 한 번도 올라 본 적이 없는 북한산 '문수봉'에 오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 처음 시식한 맛, 처음 들어본 멜로디, 처음 가보는 여행길... '처음' 상대하는 모든 것들엔 내 경험으로 그릴 수 있는 그림이 부족하다. 사전 그림이 부족하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뻔하지 않은 . 매일이 새로운 날들인 양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배우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이 나이에 찾아와 준 '첫' 여행길에 두 손 모아 감사할 일이다.


그래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혼행(혼자 하는 산행) 길에 혹시 발이라도 접질려서 움직이기 어려워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예전에 멋모르고 홀로 백운대에 올랐을 때 정상을 코앞에 남긴 지점에서 발에 쥐가 나 한참을 고생했던 적이 있었다. 어쩔 수가 있나. 무리한 종아리를 20여분 어르고 달래는 수밖에. 내려오는데 써먹어야 하니 더 무리할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던, 무척 억울했던 기억. 덕분에 등산을 할 때 내 몸 상태를 더 면밀히 살피게 되었다. 주중에는 걷기와 조깅으로 꾸준히 몸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북한산은 서울시와 고양시에 걸쳐있는 산이다 보니 등산코스와 등산로가 셀 수 없이 많다. 그 많은 코스들 중 접근 거리가 가까운 곳에서 코스를 시작하다 보니 내 시작점이 대부분 북한산성 입구라는 점이 아쉽긴 하다. 그래도 도시에 살면서 이렇게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산다운 산이 있다는 것. 팍팍한 도시 생활 중 이만한 호사가 어딨을까. 호사를 누리기 위해 전날부터 꾸리는 짐이 설렐 수밖에.


원효봉만 오르다 처음 의상봉에 오른 날. 무턱대 목표로 삼았던 문수봉은 물리적 거리보다는 심리적 거리가 더 멀었다. 내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정해 두고 그 지점을 넘어서려는 순간, 머뭇거리고 물러는 심리적인 제약. 언제나 그것이 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나를 주저하게 하는 내 안의 어린아이는 다른 이들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기에 없는 척하기 쉽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쉽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일으킬 사람은 오직 나라는 것.


대상과의 물리적인 거리는 변하지 않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의상봉에서 시작하여 문수봉까지 한 번에 가기 어렵다면 나누어서 가면 된다.


문수봉 도전 첫 번째 날, 초입부터 심상치 않게 경사가 가팔라 잔뜩 겁을 주던 의상봉에 놀라 가사당암문에서 하산했다. 2시간 40분쯤 걸렸다. 일주일 후, 문수봉 도전 두 번째 날엔 하산했던 그 지점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가사당암문쪽으로 올라 용출봉-용혈봉-증취봉까지 갔다가 하산 시간을 감안하여 부왕동암문에서 하산했다. 대서문까지 도착하니 걸린 시간은 총 3시간 50여분. 걸린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문수봉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의상봉 오르는 길은 급경사의 화강암석을 두 손, 두 발 다 써서 올라야 하는 난코스예요. by 그루잠


문수봉 도전 세 번째 날, 두 번째로 하산한 지점에서 시작하려니 중성문에서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올라야 했다. 나월봉-나한봉-청수동암문을 거쳐 마침내 문수봉에 도착한 날. 그날 문수봉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서서히 물리적 거리를 좁히면서 한층 가능성에 가까워진, 심리적인 안도 이긴 결과였. 마음은 언제나 몸보다 힘이 셌다. 마음이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면 몸은 따라가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수봉은 내가 일 년 내내 올랐던 북한산 원효봉보다 볼품이 없었다. '봉'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게 희한한 정도로 좁고 특별한 매력을 찾기도 어려웠다. 혹시 내가 문수봉이 이렇게 매력적이지 않은 봉이라는 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래도 기어이 올라와 보려고 애썼을까.

잔뜩 기대했던 소개남 직접 만나보니 꽝이어서 화난 마음을 하소연할 데 없는 아가씨처럼 싸들고 간 사과 조각에 화풀이를 했다. 우적우적 소리 내어 씹었다.


그때,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부부와 대학생인 듯 보이는 딸이 내 옆에 섰다. 얼굴에 힘겨움을 방울방울 단채, 그들이 내게 물었다.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뭔가요?"

"네, 왼쪽 제일 낮은 곳이 원효봉이고 그 옆이 염초봉, 백운대, 그 앞이 노적봉이에요."

그랬더니, 대학생으로 보이던 딸이,

"원효봉에 올라가려고 했었는데 (길을 몰라) 이리로 와버렸네요. 저기가 원효봉이군요."

하고는 세 식구가 다 함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거였다.


들의 시작점이 어디였는지는 모른다. 원효봉에 오르는 길도 모르고 올랐다가 문수봉에 오른 걸 보니 북한산 초행자들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북한산에 오르는 코스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그들이 문수봉에 오른 코스는 내가 오른 코스보다 짧은 거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길을 헤매다 어쩌다 오른 곳이라니. 그 사람들은 내가 세 번째 도전해서 마침내 오른 곳에 단번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리가 없다. 그들은 내가 30번 이상 올라서 이제 궁금할 것도 없는 원효봉을 찾지 못한 것만 아쉬워할 거다. 언제나 내 손에 쥔 보석은 반짝이기 어렵다(그분들에게 등산 코스의 바로미터, '트랭글' 앱을 추천해 드리고 싶다).


매력적이지 않은 문수봉에서 바라보니 멋진 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련해 보이는 등산객 한 분께 물어보니 보현봉이라며 몇 해 전부터 어떤 사유로 입산 금지란다. 오를 수 없는 곳이라니 더 마음을 끌어당긴다.

문수봉에 올라 내려다보니 내가 세 번에 걸쳐 지나온 의상 능선이 쫙 펼쳐져 있었다. 한 번에 이어서 오진 않았지만, 각각의 끝점을 연결하면 하나 선이 되는 능선.

사위에 뻗어있는 또 다른 멋진 능선 열심히 찍고 있는 사진사가 있었다. 그분께 능선의 이름을 물어보니 족두리봉에서 시작해서 비봉으로 어지는 능선이라고 했다. 다음에 친구와 함께 오르기로 예정되어 있던 능선이다.


문수봉에 오르는 길은 말 그대로 '악' 소리가 나요. by 그루잠
문수봉은 생각보다 멋지지 않아요.ㅜ by 그루잠
내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가게 될 길. 과거와 미래를 한곳에서 바라봐요. by 그루잠


그때 알았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문수봉 봉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스페인 기행>에서 카잔차키스는 여행이란 '모든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문수봉에서 머뭇거리며 바라보니 거기엔 내 과거와 미래가 있었다. 문수봉에 오르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내 자취들. 하찮아 보이던 점들이 연결되었을 때 뭔가에 이어지는 선이 되는 과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것. 그건 좀 묘하게 찡한 일이다.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 김민철 카피라이터가 말했듯, 어쩌면 원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충분히 증언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음엔 의상봉에서 시작해 문수봉까지 쭉 따라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 밟은 길을 다시 가는 건 물리적인 거리감만 이기면 되는 거니까. 그것보다 더 큰 심리적 거리감에서 오는 두려움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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