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지나면 온라인상에 주부들의 성토가 넘쳐난다. 명절 전부터 서서히 예열되기 시작하여 명절 직후에 터뜨리는 분화구에서 분출된 열기에덴 가정이 꽤 됐을 거다(우리 집이 그랬다는 건 아니다^^).
산행의 장점이야 나열하려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명절 증후군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등산이지 않을까싶다. 평소보다 좀 더 힘든 코스로 다녀오면 내 몸 여기저기 쑤신 게 명절 내내 부엌에 서 있느라 그런 건지, 바위산을 네 발(두 손까지)로 오르느라 그런 건지,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명절 연휴 마지막 날은 수고한나를 위로하는 날이어야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 전날 밤 등산복과 등산가방을 챙기는데, 데이트 전날 의상을 고를 때처럼 은근히 설레기까지 했다. 이번에 더 설렌 건, 한 번도 올라 본 적이 없는 북한산 '문수봉'에 오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 처음 시식한 맛, 처음 들어본 멜로디, 처음 가보는 여행길... '처음' 상대하는 모든 것들엔 내 경험으로 그릴 수 있는 그림이 부족하다. 사전 그림이 부족하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뻔하지 않은 일. 매일이 새로운 날들인 양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배우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이 나이에 찾아와 준 '첫' 여행길에 두 손 모아 감사할 일이다.
그래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혼행(혼자 하는 산행) 길에 혹시 발이라도 접질려서 움직이기 어려워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예전에 멋모르고 홀로 백운대에 올랐을 때 정상을 코앞에 남긴 지점에서 발에 쥐가 나 한참을 고생했던 적이 있었다. 어쩔 수가 있나. 무리한 종아리를 20여분 어르고 달래는 수밖에. 내려오는데 써먹어야 하니 더 무리할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던, 무척 억울했던 기억. 덕분에 등산을 할 때 내 몸 상태를 더 면밀히 살피게 되었다. 주중에는 걷기와 조깅으로 꾸준히 몸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북한산은 서울시와 고양시에 걸쳐있는 산이다 보니 등산코스와 등산로가 셀 수 없이 많다. 그 많은 코스들 중 접근 거리가 가까운 곳에서 코스를 시작하다 보니 내 시작점이 대부분 북한산성 입구라는 점이 아쉽긴 하다. 그래도 도시에 살면서 이렇게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산다운 산이 있다는 것.팍팍한 도시 생활 중 이만한 호사가 어딨을까. 호사를 누리기 위해 전날부터 꾸리는 짐이 설렐 수밖에.
원효봉만 오르다 처음 의상봉에 오른 날. 무턱대고 목표로 삼았던 문수봉은 물리적 거리보다는 심리적 거리가 더 멀었다. 내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정해 두고 그 지점을 넘어서려는 순간, 머뭇거리고 물러서는 심리적인 제약. 언제나 그것이 내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나를 주저하게 하는 내 안의 어린아이는 다른 이들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기에 없는 척하기 쉽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쉽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은 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일으킬 사람은 오직 나라는 것.
대상과의 물리적인 거리는 변하지 않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의상봉에서 시작하여 문수봉까지 한 번에 가기 어렵다면 나누어서 가면 된다.
문수봉 도전 첫 번째 날, 초입부터 심상치 않게 경사가 가팔라 잔뜩 겁을 주던 의상봉에 놀라 가사당암문에서 하산했다. 2시간 40분쯤 걸렸다. 일주일 후, 문수봉 도전 두 번째 날엔 하산했던 그 지점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가사당암문쪽으로 올라 용출봉-용혈봉-증취봉까지 갔다가 하산 시간을 감안하여 부왕동암문에서 하산했다.대서문까지 도착하니 걸린 시간은 총 3시간 50여분. 걸린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문수봉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의상봉 오르는 길은 급경사의 화강암석을 두 손, 두 발 다 써서 올라야 하는 난코스예요. by 그루잠
문수봉 도전 세 번째 날, 두 번째로 하산한 지점에서 시작하려니 중성문에서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올라야 했다. 나월봉-나한봉-청수동암문을 거쳐 마침내 문수봉에 도착한 날. 그날 문수봉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서서히 물리적 거리를 좁히면서 한층 가능성에 가까워진, 심리적인 안도감이 이긴 결과였다. 마음은 언제나 몸보다 힘이 셌다. 마음이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면 몸은 따라가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수봉은 내가 일 년 내내 올랐던 북한산 원효봉보다 볼품이 없었다. '봉'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게 희한한 정도로 좁고 특별한 매력을 찾기도 어려웠다. 혹시 내가 문수봉이 이렇게매력적이지 않은 봉이라는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래도 기어이 올라와 보려고 애썼을까.
잔뜩 기대했던 소개남을직접 만나보니 꽝이어서 화난 마음을 하소연할 데 없는 아가씨처럼 싸들고 간 사과 조각에 화풀이를 했다.우적우적 소리 내어 씹었다.
그때,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부부와 대학생인 듯 보이는 딸이 내 옆에 섰다.얼굴에 힘겨움을방울방울 단채,그들이 내게 물었다.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뭔가요?"
"네, 왼쪽 제일 낮은 곳이 원효봉이고 그 옆이 염초봉, 백운대, 그 앞이 노적봉이에요."
그랬더니, 대학생으로 보이던 딸이,
"원효봉에 올라가려고 했었는데 (길을 몰라) 이리로 와버렸네요. 저기가 원효봉이군요."
하고는 세 식구가 다 함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거였다.
그들의 시작점이 어디였는지는 모른다. 원효봉에 오르는 길도 모르고 올랐다가 문수봉에 오른걸 보니 북한산 초행자들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북한산에 오르는 코스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그들이 문수봉에 오른 코스는 내가 오른 코스보다 짧은 거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길을 헤매다 어쩌다 오른 곳이라니. 그 사람들은 내가 세 번째 도전해서 마침내 오른 곳에 단번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리가 없다.그들은 내가 30번 이상 올라서 이제 궁금할 것도 없는 원효봉을 찾지 못한 것만 아쉬워할 거다. 언제나 내 손에 쥔 보석은 반짝이기 어렵다(그분들에게 등산 코스의 바로미터, '트랭글' 앱을 추천해 드리고 싶다).
매력적이지 않은 문수봉에서 바라보니 멋진 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련해 보이는 등산객 한 분께 물어보니 보현봉이라며 몇 해 전부터 어떤 사유로 입산 금지란다. 오를 수 없는 곳이라니 더 마음을 끌어당긴다.
문수봉에 올라 내려다보니 내가 세 번에 걸쳐 지나온 의상 능선이 쫙 펼쳐져 있었다. 한 번에 이어서 오진 않았지만, 각각의 끝점을 연결하면 하나의 선이 되는 능선.
사위에 뻗어있는 또 다른 멋진 능선을 열심히 찍고 있는 사진사가 있었다. 그분께 그 능선의 이름을 물어보니 족두리봉에서 시작해서 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라고 했다. 다음에 친구와 함께 오르기로 예정되어 있던 능선이다.
문수봉에 오르는 길은 말 그대로 '악' 소리가 나요. by 그루잠
문수봉은 생각보다 멋지지 않아요.ㅜ by 그루잠
내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가게 될 길. 과거와 미래를 한곳에서 바라봐요. by 그루잠
그때 알았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문수봉 봉우리가 아니라는 것을.<스페인 기행>에서 카잔차키스는 여행이란 '모든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문수봉에서 머뭇거리며 바라보니 거기엔 내 과거와 미래가 있었다. 문수봉에 오르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내 자취들. 하찮아 보이던 점들이 연결되었을 때 뭔가에 이어지는 선이 되는 과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것. 그건 좀 묘하게 찡한 일이다.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김민철 카피라이터가 말했듯, 어쩌면 원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충분히 증언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음엔 의상봉에서 시작해 문수봉까지 쭉 따라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 밟은 길을 다시 가는 건 물리적인 거리감만 이기면 되는 거니까. 그것보다 더 큰 심리적 거리감에서 오는 두려움은 이미 사라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