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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Oct 01. 2023

사랑받을 이유, 존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게는 애정표현이 다소 과한 고등학생 딸이 있다. 한창 사춘기를 통과하던 중학생 때 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질풍노도의 끝물에 이르자 다시 예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층 업그레이드되어서.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자식의 애정표현을 '과하다' 하는가.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아닌 고등학생이나 된 아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안아달라"고 한다. 그걸로도 부족해 가끔 뽀뽀까지 해달라고 하니 덩치 큰 아이가 하는 과한 애교가 엄마인 난 사실 좀 부담스럽다.


부모가 처음인 부모들은 첫째 아이에게 사력을 다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도. 특히 홀로 자식을 셋씩이나 길러낸 내 친정 엄마 같은 분은 없는 형편에 자존심 하나는 대쪽이어서 홀로 키운 자식 티를 안 내려고 무던히도 애쓰셨었다.

큰딸인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만나도 흠 잡히지 않기를 바라신 친정 엄마의 마음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래도 너무 오래, 크게 웃어도, 실없이 넋 놓고 있어도, 친척들이 여럿 있는 자리에서 어린 조카와 시시덕 거리고 있어도 단속하신 데는 과한 면이 있었다. 특히, 큰딸인 내게 더 엄격했던 엄마의 교육 방식으로 내 자유로운 영혼은 꽤 오래 모습을 감추고 살았다. 언제나 진지한 척, 야무진 척, 어른인 척했다. 척하기 옷을 오래 입고 있으니 어느새 그게 내 모습인 듯하여 난 자라오는 동안 엄마에게 제대로 '애교'라는 것을 부려보지 못했다. 철이 들어서는 '애교를 부린다'는 것이 배운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몹쓸 성품인 것만 같아 마음이 먼저 멀리 대하곤 했다.

이렇게 자라서인지 엄마가 되어서도 지나친 애교가 편치 않다. 그러니 애교 많은 딸의 표현을 있는 대로 다 받아주지 않는 엄마에게 딸이 서운할 수밖에. 맥락 없이 부리는 애교에 마음이 무한정 열리지 않는 엄마를 둔 애교 많은 딸의 비애라 하겠다.


딸이 (내 기준으로) 지나친 애교를 부릴 때마다 제대로 다 받아주지 못하는 엄마로서의 좁은 아량에 내내 마음이 찔리기는 하나, 그렇다고 달리 개선의 여지를 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미술 치료 상담가인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었다. 친구는 딸이 "안아 달라"고 할 때마다 안아 주고 그런 표현을 하지 않을 때도 먼저 안아 주라고 다. 딸이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느낄 때까지 넘치도록 표현해 주라며.

이런 말을 듣고 온 후 며칠간은 좀 더 나를 반성하며 딸에게 더 많은 애정 표현을 하려고 노력해 보는데 그것도 3일을 넘기기 힘들다. 사람마다 표현 방식이 다른데 꼭 이렇게 내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채로 하는 게 맞나, 싶고 그런 표현 방식에 쉬 피로해지고 마는 것이다. 노력해서 표현하는 애정이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스며들지도 의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습관은 이렇게나 무섭다.


얼마 전, 동료 교사 셋과 작당모의하여 주 1회 글쓰기 모임을 갖기로 했다. 지속가능한 글쓰기를 고민하던 차에 마음 맞는 사람들과 주 1회 글을 써 공유하고 글과 관련된 각자의 삶에 대해 수다나 떨어 보자고 했다. 너무 진지하지 않게, 그렇지만 꾸준히 써 보자는 취지였다. 그렇게 만난 L 선생님의 첫 글에서 난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L 선생님의 글은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과 그리움에 관한 것이었다. 일찍부터 아버지 없이 자란 내게 '아버지'를 글감으로 글 한 편을 쓸 수 있다는 점도 부러웠지만, 더 부러웠던 것은 그녀와 아버지와의 살가운 관계였다.


그녀는 글에서 아빠의 유난했던 딸 사랑 덕에 두 돌 무렵부터 여섯 살까지 남탕에 가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단다. 엄마의 걱정에도 아들을 여탕에 데려가는 것이나 딸을 남탕에 데려가는 것은 같은데 뭐가 걱정이냐고 딸을 목욕탕에 데리고 다니셨다는 L 선생님의 아버님. 아빠가 엄마보다 안 아프게 닦아주니 엄마와 가는 것보다 아빠 따라 남탕에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는 대목에서 내 감정은 부러움을 넘어서고 말았다. 감기에 걸릴 때마다 아빠 품에 안겨 자며 인열로 인해 감기 기운을 떨쳤다는 부분, 아버지가 딸에게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따뜻한 표정과 말, 행동을 보며 자라나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린 것 같다, 는 부분을 읽을 땐 난 어느새  감정에 북받쳐 끅끅거리고 있었다.  


왜 나는 그렇게 감정에 북받치고 말았을까.

홀로 세 남매를 키워 내야 했던 친정 엄마는 여유 없는 삶을 사셨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셨다. 그럼에도 어린 나는 좀 더 따뜻한 표현을 원했던 모양이다. 인정받는 딸이 되기 위해 내 본모습을 누르며 살았던 어린 내가 좀 측은했던 모양이다. 내가 맏딸로서 무엇인가를 해내어야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이유는 충분하다는 일상의 시그널원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자란 내가 엄마와 똑같은 모습으로 딸을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딸에게 너무미안해진 모양이다.


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결핍된 것들과 충족된 것들이 모두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내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었는대도 여전히 어렸을 때 불만스럽던 내 모습으로 산다면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의 독립을 이뤘다 할 수 있을까. 진정 원한다면 결핍으로 불만스러운 어린 시절의 나를 단호히 끊어낼 필요가 있다.


난 이제 무엇인가를 증명해야 어른들로부터 인정받던 어린아이가 아니다. 부모가, 주변 어른들이 바라던 내 모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은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 보기를 바란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에도 증명하고 사느라 분투했던 나를 보듬길 바란다.



애교 많은 딸은 톡 대화마저도 애교가 넘쳐난다. "응"을 "웅냐", "오옹", "옹앵"과 같이 답하는 식이다. MBTI에서 찐 F(감정형)인데도 딸에겐 자꾸 T(사고형)되는 엄마인 난 "외계어 쓰지 말고 인간의 말을 하"라며 딸의 애교에 찬물을 끼얹는다. 결국 또 딸에게 "엄마 T야?" 소리를 듣고 만다.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 내가 즐거움 본색을 드러낼 때마다 진지함을 강요받던 때가 그렇게 싫었으면서. 다시 또 내 마음을 단속해야 할 때가 왔나 보다. 


딸, 넌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야. 엄마에게 향한 무한 애정에 엄마가 복에 겨웠나 봐. 기다리고 기다리던 네가 엄마에게 왔을 때 너무나 좋아서 엄마는 열 달 내내 행복했지. 4개월 가까이 그렇게 심하게 입덧을 할 때도 행복했었지.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정말 행복하게 10달을 채웠지. 남들이 좋다는 거 말고 엄마가 원하는 거 하며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며 환호했지. 매일 배를 어루만지며 '사랑해'를 말했지.

그때 매일 했던 표현을 엄마는 왜 이렇게 아끼고 있을까. 그래도 그때 그렇게 많이 말해서 엄마가 지금 좀 덜해도 우리 딸은 엄마에 대한 애정을 멈추는 법이 없지. 그렇다고 부족한 엄마가 아닌 건 아니지만.

딸이 엄마에게 하는 만큼은 어렵겠지만 더 노력할게. 더 사랑할게. 더 많이 표현할게. 넌 존재만으로도 사랑받기에 충분하니까.


딸, 네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려고 노력할게.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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