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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Aug 18. 2023

내 마음의 고향이 송두리째 사라지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마음속 고향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전라남도 강진은 내게 그런 곳이다. 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그곳엔 내 첫 발령지가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내 20대 한 자락이 켜켜이 쌓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발령지가 강진이란 사실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 당시 내가 아는 전남의 지명은 나주, 함평, 목포 정도였고 좀 더 먼 지역이라면 '땅끝 마을'로 알고 있는 해남 정도였으니 난생처음 들어보는 지명에 20대의 나는 겁부터 났었.


'첫 부임지=강진'이라는 정보 제일 먼저 한 일은 도대체 이곳이 어디에 붙은 곳인가, 찾아보는 일이었다. 지도상으로 보니 땅끝 마을로 알고 있던 해남보다는 가까웠지만 당시 내 엔 오십보백보였다. 내 꽃다운 20대가 대한민국 땅의 끝자락에서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불현듯 찾아온 두려움은 임용 전 그 어떤 오지라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겠다던 결심에 비추너무나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전라남도에섬이 많아서 돌이켜 보면 육지에 발령 난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할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내게 강진은 집에서 머얼리 떨어진 곳, 섬이나 진배없었다. 

거주할 숙소를 구하기 위해 찾아 간 강진은 영화 속에서나 봤음직한 시골이었다. 극장은커녕 당시 도시에 유행하기 시작하던 비디오방 하나 없었고 예쁜 카페 대신 여전히 '다방'(집 구하기 사이트 말고요)이 존재하던 '깡촌'이었다. 밀레니엄 시대에 고장 난 타임머신을 타고 난데없이 70년대로 내동댕이쳐진 기분. 몰라서 무식한 용감함이 무기였던 젊음도 난데없이 펼쳐진 낯선 장면에는 마냥 낙관적일 수 없었.

 

논두렁길 사이에 놓인 첫 부임지의 첫인상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시골 학교는 내가 어렸을 때 한때 다녀보기도 했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라면 어디든 간다, 고 마음먹었었던 때라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으니... 내가 착각한 게 있었다. 가르치는 일로서 받아들이는 시골 학교와 사람들만 생각했었지, 그 시골에서 내가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봤던 것이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내내 머릿속에 그린 내 모습은 정겨운 학교에서 순박한 시골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읍내에는 나 같은 외지인들을 위해 깔끔하게 새로 지은 원룸이 한 동 있긴 했지만 당시 형편으로는 원룸의 월세를 감당하기 벅찼다. 결국 학교마다 배정된 오래되고 낡은 관사에서 생활하기로 다. 그마저도 학교 교직원 수에 따라 호수가 배정되어 15평 남짓한 작은 빌라 한 호에 미혼 여교사 셋이 함께 지내야 했다.

작은 방 1개와 큰 방 1개, 그렇게 방이 2개 있었는데 먼저 온 다른 선생님이 자기는 다른 사람이랑 한 방 쓰면 불편해서 못 잔다며 냉큼 작은 방 하나를 차지해 버렸다. 남은 나와 생면부지의 다른 신규 교사 한 명은 "저희도 남이랑 한 방에서 자는 거 불편해요오." 란 말도 제대로 못 해보고 졸지에 남은 방을 공유해야 했다. 그때 한 지붕 세 미혼 여자들의 강제 거주 스토리만 묶어도 브런치북 한 권은 엮이않을까.


시간이 멈춘 듯한 곳에서 앞으로 무료함을 어찌 달래나... 한숨이 나왔었는데 그곳에서 7년 여를 보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았다. 대한민국 땅끝 가까이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인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스토리도 엮으면 거뜬히 브런치북 한 권이겠다(앞으로 브런치북 소재 걱정이 없겠네.ㅎ).

운동장만 덩그러니 크고 전교생이래 봐야 60여 명 남짓이었던 학교에서 만났던 아이들은 얼마나 순박하고 정겨웠던가. 전교생에게 '새천년 체조'를 가르치던 운동장은 아이들 숫자에 비해 또 얼마나 턱없이 컸던가.



지난 주말, 팔순을 맞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댁 형님네와 오래전부터 계획한 1박 2일 여행지인 진도에 다녀왔다. 지금이라면 강진에 근무했을 당시 진도나 완도 등 인접해 있던 수많은 섬들에 가봤을 법도 하련만. 당시엔 친구들과 만나 기껏 진출한다는 곳이 고작 목포였다. 북적이는 도심이 고팠던 젊은이들에겐 섬보다는 조금이라도 번화가인 목포가 훨씬 매력적이었을 것임은 당연지사. 그러다 보니 진도가 강진과 매우 근접한 곳임을 이번 여행에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여행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국도 표지판에서 '강진'이란 지명을 보자 가슴이 요동쳤다. 진도에서 경기도 고양까지 돌아오는 길은 장시간 운전길이었지만 그대로 올라가면 왠지 나중에 후회가 될 것 같았다.


"우리 강진에 한 번 들렀다 갈까?"


운전대만 잡으면 도착지점 외엔 쳐다도 보지 않는 남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남편에게 강진은 나와 다른 이유로 마음에 남아있는 곳일 테다. 결혼 후 3년 간의 신혼 생활을 주말 부부로 지내면서 일주일이나 2주 간격으로 꼭꼭 내려왔으니 그곳이 어찌 타지라고만 여겨졌을까. 서울이라는 타향에서 오래 생활했던 남편에게도 강진은 남다른 곳이었다.


젊은이들이 즐길만한 현대적인 문화 시설은 극도로 열악한 곳이었지만 '풍성한 먹거리'세대를 아우르는 강진의 대명사였다. 외지인이 강진을 찾는다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로써 '다산초당''영랑생가' 방문이 첫 목적이겠지만, 미각을 낱낱이 만족시켜 주는 향토 음식을 맛보러 오는 목적 또한 결코 뒤처지진 것이었다. 애틋한 신혼부부의 재회가 강진의 향토 음식 덕분에 몇 배 더한 기쁨으로 채워졌다는 데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의견 일치를 보일 것이다.  

  

강진으로 향하는 길, 정겨운 읍내의 모습과 함께 정갈하면서도 오감을 만족시키는 풍성한 음식 맛을 기대하며 입 안에 미리 군침을 대기시키이가  혼자만이었을까. 

그런데...

네비가 알려줬으니 우리가 다시 찾은 곳이 강진인가, 싶었지, 네비가 아니었다면 우린 아마 길을 잘못 찾은 것이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내 머릿속에 있던 강진은 그곳에 없었다. 길도, 건물도 완전히 달라진 그곳은 우리 기억 속 강진이 아니라 2023년의 여흔한 지역일 뿐이었다.


떠나온 지 20여 년, 강산이 적어도 한 번은 바뀌었을 시간에 우린 왜 그곳은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 내 청춘의 한 자락이 촘촘히 그려져 있던 그림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허망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편과 나는 너무 달라진 길목을 차로 구석구석 돌며 혹여라도 눈에 익숙한 곳을 찾아보려 한없이 두리번거렸다. 눈에 익숙한 한 지점만이라도 발견한다면 변천사를 유추라도 해 볼 텐데...


안타까움이 실망으로 변할 즈음, 번화가를 돌아 나왔더니 아직은 개발이 덜된 듯한 작은 길을 발견했다. 읍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그 길이 당시 내가 머물었던 관사로 향하는 길임을 알고 얼마나 뛸 듯이 반가웠던지! 그 길 위에 서니 당시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소환되었다. 남편과 나는 길에서 당시의 우리라도 마주친 듯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눈시울이 따끔해졌다.

관사는 페인트 칠 등 외관상 모습이 약간만 달라져 있었다. 역시 학교 관련 건물은 재개발을 모른다. 그 점이 우리를 이렇게 기쁘게 할 줄이야. 그곳을 출발점으로 다시 중심지로 이동했지만 역시 대대적으로 바뀐 읍내는 다시 봐도 생판 다른 곳이었다.


기억의 자락을 더듬어 추억을 소환하려는 노력에 실패하는 동안 배가 꽤 출출해졌어도 우린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만날 수 있는 흔한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카페에서는 추억의 맛이 소환될  만무했때문이다. 20여 년 전, 특별할 것 없는 간판에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도 각각의 특색이 넘쳐나던 그곳의 음식을 더 이상 맛볼 수 없다니... 그 실망감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추억의 음식은 포기하고 내 첫 부임지만이라도 보고 가자고 겨우 겨우 길을 찾아갔다. 읍에서 조금 떨어진 학교로 가는 시골길도 변화가 있었지다행히 찾아가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예전 흙길 위에 단정히 깔린 아스팔트 끝에서 첫 근무지였던 학교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았어도 학교 건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였는데,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운동장에 잡초가 무성했다. 인터넷에 검색하니 2020년 이래 '휴교' 상태였다. 20년 전에도 전교생이 60~70명 남짓이었으니 지금까지 학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내 마음의 고향이 송두리째 사라진 듯했다. 

아쉬움을 넘어 슬픔이 밀려왔다.


현재도 교직원 관사 건물(왼)과 축구 센터(오). 당시엔 탁구장이었다. 그때 거기에 쏟아부었던 돈을 생각하면 난 탁구 선수가 되어 있어야 마땅할텐데. by 정혜영
내 첫 부임지였던 초등학교. 아이들이 떠나간 운동장에 잡초만 무성히 자라있다. by 정혜영


속속들이 바뀐 그곳을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에는 20여 년 전의 강진의 모습만 맴돌았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외형이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져대상과 함께 한 구체적인 시간과 낱낱의 기억들이 있는 한,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마음에 새겨지.


지금 이 순간,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공간도, 함께 한 사람들도 20년 후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20전, 서투르고 어설펐지만 한없이 정겹고 그리운 내가 있었듯, 20년 후의 내가 오늘의 나를 회상하면 그러할 것이다.

미래의 내가 조금 넉넉하게 미소 지으며 추억에 젖을 수 있도록 가장 젊고, 혈기 왕성한 오늘을 잘 살아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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