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빵'을 날릴 타이밍인 줄 알았습니다
남편과의 신경전이 불러온 괴이한 일
괴이한 일이었다.
일주일 전 밤에 일어난 일은 이전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며 이후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 주말, 남편과 사소한 신경전을 벌였다. 개학을 며칠 앞둔 시점이어서였는지 나는 심신이 다소 예민해 있었다. 평소와 크게 다름없는 가족들의 생활 패턴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소한 일에도 날이 섰다.
남편이 주말에 거실에서 하루 종일 TV 시청하는 것에 대해 이전에도 종종 불편한 내색을 했었다. 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다른 집 남자들도 별반 다를 바 없는 듯하여 싫어도 그냥저냥 넘어가기도 하고 살살 달래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대엔 'TV 쉼의 시간'을 가져보기도 했었다. 그러니 주말이면 아무 방해 없이 각종 온라인 기기들과 접속된 상태로 지내고 싶어 하는 남편이 하루쯤 TV와 한 몸이 된 들,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모든 것이 그냥 넘어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귓등으로 듣는 듯한 남편의 행동이 몹시 거슬렸다. 딸이 인터넷 강의 전용으로 쓰겠다고 가져간 태블릿을 유튜브 전용으로 시청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한바탕 격전을 치른 지 며칠 안 된 시점이어서였을까. 딸이 부모에게 잘못된 예를 답습한 것 같아 남편에게 향한 뾰족함이 더해졌다. 아이들이 있는 시간대엔 거실에서 TV를 틀지 않기로 하지 않았느냐는 내 말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을 것이다. 말보다 표정이 더 험한 말을 마구 던졌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평소엔 알았다, 는 말 한마디로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무마하던 남편이 그날엔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잘됐다. 마침내 '선빵을 날릴 타이밍'이 왔구나, 싶었다. 친구들 부부도 이 나이쯤 되니 대부분 각방을 쓴다고 했다. 부부 침실에 싱글 침대 두 개를 들여 각자의 침대에서만 자도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라는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이 기회에 부부 침대에서 독립해서 장년기 이후의 내 수면에 평안을 안겨줄 때가 왔노라, 싶었다.
선빵을 날릴 타이밍이라 여겼다. by 정혜영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니, 침대에 있던 내 베개를 들고 나와 거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거실에서 쫓겨간 남편이 다른 방에서 늦게까지 보고 있던 TV 소리가 아슴아슴해질 무렵,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들어가서 자."
남편이 툭툭 내 어깨를 흔드는 소리에 설핏 잠이 깼다. 다시 짜증이 몰려왔다. 곤히 잠들게 놔두기나 할 일이지, 왜 또 수선을 떤담. "그냥 놔두라"는 나와 "어서 들어가서 자"라는 남편이 한참 옥신각신하다 남편이 소파에서 자겠다는 말에 다시 베개를 챙겨 침실로 몸을 옮겼다.
다시 곤한 잠에 빠지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터였지만, 그 상황은 내가 처음에 바랐던 그림이지 않은가. 널찍한 침대에 혼자 누우니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이제 평안한 잠을 청하기만 하면 되었다. 달아난 잠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머릿속에서 울타리를 뛰어넘는 양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몇까지 셌을 때 잠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독차지한 침대였지만 습관은 무서운 것이라 나는 평소처럼 벽 쪽에 등을 대고 모로 누워 잠들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내 등 뒤로 거대한 뭔가가 비집고 끼어들어오는 느낌에 설핏 다시 잠에서 깼다. 겨우 든 잠에서 다시 깨니 기분이 더 나쁠 수밖에. 침대 공간이 넓게 남았음에도 꼭 비좁은 곳을 비집고 들어오는 남편에게 화가 났다. 소파에서 자겠다고 하더니 들어왔으면 곱게 잘 것이지, 왜 또 잠을 깨우고 난리람! 몹시 언짢아진 마음에 화라락 성이 올라왔다. 잠시 후 등 뒤에서 남편의 팔이 내 어깨를 주욱 감아왔다. 또 이렇게 두리뭉실 넘어가려고 하나, 기분이 나빠 남편의 팔을 확 밀쳐내려고 했다. 그런데 꽉 두르고 있는 팔의 힘이 너무 세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놓으라고!" 소리치며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밀쳐내려고 한참을 버둥거렸더니 어느 순간, 겨우 팔이 스르르 풀렸다. 너무 약이 오르고 화가 나서 단단히 뭐라고 해주려고 등 뒤를 획 돌아보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내 등 뒤에도, 주변에도, 방 안 어디에도...
0.1톤에 육박하는 남편이 그새 몸을 밖으로 옮겼을 리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나 나를 꼭 틀어쥐고 있던 남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상하게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는 것, 힘은 세었지만 남편의 어떤 체온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그때서야 자각했다.
이게... 뭐지? 잠시 멍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악몽을 꾸었나 보다, 싶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이번엔 울타리를 뛰어넘는 양을 더 많이 세어야만 했다.
잠시 후, 이번엔 위쪽에서 내 몸 전체를 짓누르는 엄청난 무게에 나는 다시 버둥거리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도무지 목소리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입도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고 싶었지만 접착제로 붙인 듯 눈조차 떠지지 않았다. 조금 전 악몽이라 생각했던 것이 그냥 악몽이 아니었단 말인가. 악몽이 이렇게 시리즈로 올 수도 있단 말인가!
얼마나 버둥댔을까. 한참을 짓누르던 것이 다시 스르르 내 몸에서 벗어나더니 침대 맡에 놓아둔 선풍기 쪽으로 옮겨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있으니 오로지 내 몸 끝단의 감각기능만이 바짝 예민해져 활성화되어 있었다. 피부와 감각 중추로 느껴지는 느낌으로만 상황을 판단할 뿐이었다. 그제야 눈이 움찔움찔 떠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눈을 뜨고 실제를 마주하는 게 너무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나를 제압했던 대상이 남편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눈을 떴다가 진짜 정체 모를 그 '뭔가'와 마주한다면 어쩌나.
얼마간 눈을 뜨지도, 그렇다고 잠을 잘 수도 없는 상태로 누워 있다가 어느 순간, 발밑에서 서늘한 느낌이 사라지자 눈을 뜰 용기가 났다. 방안에 아무것도 없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혼자서 잠든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시 이 모든 상황이 또 리플레이될까 봐 너무 겁이 났으니까.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거실 소파에 잠들어 있던 남편의 어깨를 흔들었다.
"들어와서 자."
설핏 잠이 깬 남편이 내 말에 그럼, 당신이 다시 나와서 잘 것이 아니냐고 그냥 자겠다고 했다.
지금은 내게 당신이 필요한 타이밍이라고!
라는 말은 못 하고 나도 그냥 침대에서 잘 거라고만 했다. 그때서야 남편은 베개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잠시 후 코를 골며 곤하게 잠이 들었다. 옆에 남편이 누워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무서움의 온도가 옅어졌다. 남편이 다시 침대로 돌아오자, 다시 이전의 가위눌림은 반복되지 않았다.
이렇게 내 부부 침실 독립은 물 건너갔다.
대체 그날 밤 내게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스트레스 상태로 잠이 든 내 어지러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을까. 며칠 후 이날의 이야기를 들은 남편의 말대로 남편에게 쓸데없이 성깔 부려 터줏대감님께서 노하신 것일까. 영감 귀신이 들러붙었나 보다고 놀려대는 남편을 보며 앓느니 죽지, 싶었다. 힘이 센 거 보니 분명 총각 귀신이더라는 실없는 농으로 대거리나 하며.
남편에게서 혼자 자다가 가위눌렸다던 얘기를 종종 들었을 때는 남편이 기가 허한 사람, 이라고 놀리곤 했었다. 나랑 함께 잘 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해서 내 센 기가 보호해 주는 거라고 득의양양했었는데... 모른다면 모를까, 가위눌림은 알고는 또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선빵을 날릴 기회인 줄 알았다가 판정패를 당했으니 당분간은 남편에게 잘해줘야 할 타이밍이다.
그날 밤 있었던 일을 들은 남편이 침실 쪽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하며,
"그런 얘기 들으니까 무서워 죽겠네!"
하며 너스레를 떤다. 이런 남자를 믿고 앞으로 30~40년을 더 살아야겠지. 내 기가 더 세지는 방법을 찾아보는 게 더 현명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