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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Sep 02. 2023

어린이의 <홀로 아리랑>

'독도리나'라는 악기를 아시나요?

*글에 들어간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우리 반에는 아이들과 함께 일 년 동안 진행하는 두 가지 '나도 00' 프로젝트가 있다. 한 가지는 '나도 작가'라는 글쓰기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음악가'로 작은 소프라노 오카리나인 '독도리나' 연주 활동이다. 독도리나는 손과 손가락이 작은 1~2학년 아이들의 손에도 쏙 들어가 다양한 곡을 연주하기 용이한 한국식 오카리나 악기이다.


1학기 때 쉬운 동요 몇 개를 시작으로 독도리나 운지법을 익히고 연주 자세를 잡은 후 좀 더 난이도를 높여 연습을 해나갔다. 1학기 말, 여름 방학을 앞둔 며칠 전 점심을 먹고 학교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에서 정말 갑작스럽게 게릴라 콘서트를 열어 '섬집 아기'와 '뭉게구름'을 연주한 뒤로 아이들은 독도리나를 연주하는 자신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독자가 있는 글쓰기가 그렇듯, 청취자가 있는 연주란 우리만 아는 교실 연주와는 임하는 자세부터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요렇게 앙증맞은 악기가 한국식 오카리나 소프라노 악기인 '독도리나'랍니다. by 한국식오카리나협회


2학기가 시작되고 우리 반에서 특히 독도리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민지는 자꾸 내 악보 파일에 담긴 곡들을 궁금해했고 아이들이 무료해할 때 내가 가끔 연주해 주는 곡 중 마음에 드는 악보를 먼저 받아보고 싶어 했다. 민지는 집에서 연습한 뒤 다음날 깜빡 잊고 놓고 올까 봐 잘 때도 악기를 목에 걸고 잔다고 한다.


민지는 1학기 초반에 친구들과 잦은 트러블로 걸핏하면 불려 오던 아이였다. 그런데 독도리나와 친해진 뒤 새 곡을 배우고 금방 익히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챈 후 다른 아이가 되었다. 연주 연습 숙제를 안 해서 자꾸 뒤처지는 몇몇 남자아이들과 새 곡을 배우는 날 결석하여 첫 배움을 놓친 친구들을 대상으로 민지는 쉬는 시간이면 자발적으로 친구들을 가르쳐 주는 독도리나 조교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민지 덕분에 이제 우리 반 아이들의 연주 실력이 고르게 나아지고 있으아이들의 재능은 정말 다양하다.

독도리나를 배우지 않았다면 민지의 그런 재능을 어찌 알아보았을까. 특히 초등교육과정에서는 다양한 교육활동을 통해 아이들마다 달리 타고 난 달란트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를 마련해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요즘 아이들과 배우고 있는 곡은 <홀로 아리랑>이다. '외로운 섬, 독도'를 가사에 품고 '통일'의 지향성을 담고 있어 우리 민족의 공통된 정서를 공유하기에 좋은 곡이다.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남녀노소를 하나로 묶어주는 데 음악만 한 것이 있을까. 아이들의 문장에 드러난 비슷한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홀로 아리랑이라는 곡을 배웠다. 홀로 아리랑은 곡이 긴데 반복적이어서 쉽다. 그리고 이 곡은 아름답다. 때로는 곡이 슬프다.
홀로아리랑을 들으면 편안하고 기분도 좋아진다.
오늘 홀로 아리랑을 불었다. 오늘 불러보니 점점 노래가 완성되고 있다. 노래가 약간 슬프다. 그래도 노래는 좋다. 나중에 완성해서 엄마한테 불러줄 거다. 빨리 외우고 싶다.   


구슬픈 멜로디에 희망을 향해 한 발, 한 발 함께 내딛는 발걸음이 뭉클하게 다가오는 리듬과 가사가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나 보다. 빠른 템포의 <뭉게구름> 뒤에 배우는 느린 곡이라 아이들이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쓸데없는 기우였다. 빠른 곡을 배울 때 리듬을 따라잡기 어려워하던 승규도 쉬는 시간에 반복되는 구절을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걸 보면.


5교시 때 선생님이 "독도리나 준비!"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 두근두근 심장이 콩콩 뛰고 너~무 설렜다. 그래서 독도리나 악보 파일을 얼른 준비했다. 빨리 불어보고 싶었다.
드.디.어! 홀로 아리랑을 분다! 불었는데 너~무 쉬웠다. 왜냐하면 그저께 세정이한테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때 세정이가 말해줬다. 그 노래에서 딱 2줄 반만 배우면 다 배우는 거라고. 왜냐하면 2줄 반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또 배우고 나니 더 재미있었다.
오늘 홀로아리랑을 불었다. 오늘따라 더 잘 불어졌다. 그리고 웃긴 점도 있었는데 악보가 2장이나 있어서 많이 어려운 줄 알았는데 계속 어떤 가사들이 반복이 돼서 조금 웃겼다. 홀로 아리랑 노래가 너무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 Top 10'에 뽑힐 듯하다.


처음으로 2장짜리 악보를 받았을 때 아이들은 온몸으로 당황스러워했다.

"허억!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왜 이렇게 길어~!"

"이걸 언제 다 배워요?"

아이들은 너나없이 어려운 과제를 받아 든 낭패감을 과감 없이 토로했다. 이럴 때 교사는 '길라잡이' 역할이다. 악보의 처음에 빨간색으로 빗금을 긋고 악보 두 줄 반쯤 부분에 다시 빨간색으로 빗금을 그어주었다.

"얘들아, 두 장이라 엄청 길어 보이지?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이 두 줄 반만 배우면 나머진 전부 반복이거든."

아이들의 표정엔 설마...? 군데군데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비쳤지만 그래봤자다. 일단 첫마디가 시작되면 못 먹어도 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잘 맞춰 불려 나오는 음에 쑥 자란 자신의 실력에 스스로 더 놀랄 것이다. 반백의 담임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40년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이들에게도 닿아 좋아하는 노래 Top10에 오르다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세대를 관통하는 공통된 문화와 정서를 느낄 때, 세대 차는 급격히 간격을 줄인다. 50인 나는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문어의 꿈'을 흥얼거리고 9 아이들은 '홀로 아리랑'을 분다.   


독도리나로 홀로 아리랑을 했다. 나는 홀로 아리랑이 헷갈렸다. 근데 갑.자.기. 잘됐다. 천천히 했더니 잘됐다. 천천히 타이밍을 맞추니 노랫소리도 예뻐졌다. 나는 이제 독도리나와 잘 맞는 것 같다.


다른 이들의 속도에 무리하게 맞추다 자신의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나 해봤을까. 꾸준히 천천히 가다 보면 언젠간 자신의 속도가 생겨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래, 천천히 갈 수 있는 용기'다. 타인이 내 속도를 몰아붙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용기, 내 속도가 아니라면 과감히 멈춰서 숨을 고르고 다소 늦어졌더라도 다시 천천히 내딛을 수 있는 용기. 내가 뒤쳐진 게 아니라 나만의 속도를 가늠해 가고 있음을 알아챌 용기, 말이다. 내게 맞는 속도는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러니 용기를 낼 사람은 바로 ''인 것이다.


우석이는 자신의 타이밍을 찾고 예쁜 노랫소리도 찾고, 마침내 독도리나와 친해졌으니 9살의 담대함이 그저 기특하다. 이 모든 과정에 새겨진 우석이의 마음이 휘발되지 않고 오래오래 머물기를 바란다.


<홀로 아리랑>이 끝나면 <소풍>이라는 빠른 템포의 곡을 배우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1학기 때부터 들은귀가 있어 잔뜩 기대 중이다. 빠른 리듬에 엄두조차 못 낸 녀석들이 이제 어서 빨리 배울 날을 고대하고 있다니, 아이들은 참 빨리 자라고 큰다. 여전히 악보를 안 보고는 실수하는 나. 분발해 연습해서 잘 외워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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