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자신의 성을 확신하나요? <대니쉬 걸>

여자가 된 남자

by 정혜영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남성 혹은 여성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모두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타고난 정체성 역시 살면서 끊임없이 변한다.
- 마그누스 허쉬펠트


우생학이 활개 치던 20세기 초에 이와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허쉬펠트는 성소수자를 자연적인 존재라 여겼던 유대계 독일 의사이자, 스스로가 양성애자였다고 한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아는 사람이기에 성소수자의 독립과 동성애 해방을 위해 열정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영화의 제목에서 지칭하는 '덴마크 여인'은 1920년대 덴마크의 유명한 풍경화가였던 에이나르 모겐스 베게너(1882~1931)이다. 여인이니 여자라고 생각하면 오산. 베게너는 남성으로 살다가 기록상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통해 여성이 된 사람이다.


영화 <대니쉬 걸>은 베게너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 겪게 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릴리 엘베'로서의 두 번째 삶을 다루고 있다. 영감을 교류하던 동료 화가이자, 사랑하는 아내였던 게르다가 겪어야 했던 고뇌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신기한 동물사전>에서 주연, 뉴트 스캐맨더 역을 맡았던 에디 레드메인의 섬세한 감정선을 담은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이다.




베게너(에디 레드메인)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된 계기는 아내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초상화 모델을 대신 서게 되면서부터였다. 초상화를 주로 그리던 게르다가 남편인 베게너에게 다리 모델을 서 달라고 요청한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베게너도 계속되는 요청에 스타킹을 입고 굽이 있는 신발을 신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격정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이후 베게너는 여장을 하며 사는 삶을 택하게 되고,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위해 성전환 수술까지 감행한다. 하지만 5차례에 걸친 성전환 수술로 인한 감염증으로 결국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다.


영화 <대니쉬 걸>

수염을 제거하고 화장을 하며, 여성의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남자와 그(그녀)를 남편으로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 게르다. 지금처럼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는(것으로 보이는) 시대에 생긴 일이라 해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문제인데 1920~30년대의 일이라니. 그들이 감당해야 했을 삶의 무게가 얼마나 버거웠을까 싶다.

게르다는 그(그녀)가 죽은 후에도 일생동안 릴리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니, 베게너이자 릴리를 영원히 사랑했던 그녀의 마음이 애잔하다.

(왼) 여장을 한 베게너(릴리 엘베), (오) 게르다가 그린 릴리 엘베

영화에서 베게너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보다는 여장을 한 이후의 모습인 '릴리 엘베'를 더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내 게르다를 그렇게 사랑했으면서도 새로이 발견한 성 정체성을 꼭 쟁취했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오만함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베게너가 결혼까지 한 이후의 삶에 대해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그녀)가 이전에 겪었을 성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게르다가 베게너가 어릴 적 한스(마티아스 쇼에 나에츠)라는 친구와 키스를 나눈 적이 있고 이를 목격한 베게너의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었다는 추억담(?)을 들려준다. 이를 통해 베게너가 청소년기에 성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겠다.



사회는 시스템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사람들의 정체성을 특정하게 가르고(여자/남자, 아이/어른, 유색인/백인, 장애인/비장애인, 노동자/자본가 등) 그런 사회 속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들은 고민 없이 다수가 합의한(합의했다고 생각하는) 범주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게 된다. 그 범주에 속하지 않은(혹은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생기면 이상, 기형, 질환 등으로 치부하고 고치려고 하는 데서 고통이 따르게 된다.


성 정체성에 대해 별 고민 없이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고민과 갈등 속에 유년기를 보내고 여전히 괴롭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 이들에게 어떻게 함부로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한때,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충동적, 감정적이라는 이유로 여성에게 법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던 시대만큼 사회의 기득권이 함부로 사람들을 재단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남자가 여자의 시선을 받으면 불편해하죠.
하지만 시선을 받아들이는 건 즐거운 일이죠.
일단 받아들이면요.


게르다가 영화 속에서 남성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하는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베게너가 이후 릴리 엘베로서의 삶을 사랑하게 됨을 암시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편견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거두고 받아들인다면 행복할 수 있다는 중의적인 의미로도 읽히므로.


더 이상 성소수자와 성 정체성의 문제가 종교적, 정치적인 문제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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