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영 Oct 22. 2023

내 아이 마음을 얻는 비결


"엄마 몰래 아빠랑 이런 거 해봤어요! 하는 경험 한번 나눠볼까?"

국어 시간에 아이들과 '나만 보면 자꾸만 10살짜리 아이가 되려고 한다'는 아빠를 노래한 동시를 읽었다. 시에서 '엄마 몰래 달고나 해 먹을까?'라는 부분이 재밌어서 아이들에게 비슷한 경험이 있으면 나눠보자고 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 손이 쭉쭉 올라갔다.


- 아빠가 엄마 몰래 치킨을 시켜 먹자고 했어요.

- 엄마 몰래 아빠가 밤에 라면 끓여 먹자고 했어요.

- 엄마 잠들어 있을 때 아빠가 엄마 몰래 TV를 보자고 했어요.

- 엄마 외출했을 때 엄마 몰래 아빠랑 컴퓨터 게임을 했어요.

- 엄마 몰래 아빠랑 빵을 사 와서 먹었어요.


아내들의 눈치에 혼자는 감행하지 못하고 아이들과 작당모의하는 아빠들의 모습이 떠올라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PC사양이 안 되어 원하는 게임을 깔 수 없다는 아이 말에 그동안 모아놓은 아이 용돈에 몇 푼 보태어 PC를 통째로 바꾸던 남편 생각이 난 건 우연이었을까? <안나 까레리나> 첫 문장에서도 "모든 행복한 가정은 비슷하게 닮아 있다"고 했으니 가정마다 비슷한 아빠들의 모습은 행복한 가정의 표상쯤으여겨야 하려나.

아무튼 이어갈 수업이 있어 그쯤에서 아이들을 진정시켰기 망정이지, 계속 들었다면 각 가정에서 엄마 몰래 벌어지는 아빠와 아이들의 수상한 밀담은 끝이 없었겠다.


아이들은 그렇게 '엄마 몰래' 아빠와 함께 한 일들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빠와 몰래 함께 나눈 일들이 "즐겁고 신났다"고 했다. 아이들에게도 말 못 할 고충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대놓고 묻는 "엄마가 좋아?/아빠가 좋아?" 사이에서 은근히 긴장하며 "엄빠"라는 답을 영민하게 준비했어야 했을 자녀로서의 고충을 엄빠가 알랴. 그런데 이렇게 엄마 모르게 아이를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빠의 시도 앞에서 아이들의 선택이란 얼마나 쉬운가. 엄마가 모르니 얼마든지 아빠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다. 아빠가 엄마로 바뀌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한편이 되어 뭔가를 도모하고자 하는 엄빠들에게서 아이들은 은근히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을지 모른다. '훗, 역시 우리 엄마, 아빠는 나 없으면 안 돼.' 하며.


학부모 상담 주간에 어머님이 아닌 아버님이 상담을 오신 가정이 있었다. 아버님은 아이 어머님께서 보내주신 질문들로 가득한 메모창을 열며 다소 수줍어하셨다. 수업 태도와 전반적인 학교 생활, 교우 관계 등을 묻는 질문은 여느 학부모들의 궁금증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아버님의 수줍음은 아이의 성적이 학급에서 어느 정도 수준이냐는 질문을 꺼내실 때 좀 더 짙어졌다. 아내가 보낸 질문지를 보며 이것저것을 물으시던 아버님의 마지막 질문은, "더 나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좀 더 빨리 서울로 옮겨야 할까요, 아이가 익숙한 환경에서 계속 학교를 보내는 게 나을까요?"였다. 이 질문을 하실 때도 아버님의 말투와 표정에서 이런 질문, 괜찮은가요? 가 읽혔다.

"아이 엄마가 교육열이 좀 높아요."

아버님은 질문에 대한 겸연쩍음을 이렇게 대신하셨다. 아직 어린 자녀를 둔 젊은 엄마와 아빠의 미래 자녀 교육에 대한 고충이 느껴졌다.


아버님은 초등 2학년밖에 안 된 자녀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게 부끄러운 듯 보였지만, 이는 무한경쟁의 대한민국 땅에서 자녀를 키우는 모든 부모들이 가진 공통 고민이 아닌가. 어차피 나중에 입시 경쟁에 뛰어들 거 미리 좋은 학구를 찾아 아이의 공부길을 터줘야 할 것인가, 아니면 느리더라도 언젠가 아이가 자신의 꿈을 찾아 재능과 역량을 발현할 것을 믿고 기다려줄 것인가?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크게 이 두 양 극단 사이에서 끊임없는 진자 운동을 한다. 후자 쪽에서 오래 머물렀다가도 어느새 전자 끝단에서 고민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다른 집 아이들 다 보내는 학원에 우리 아이를 안 보내면서 불안하지 않은 강철 마인드를 가진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한 열 명쯤 자식을 성공적으로 키워냈다면 좀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까, 싶다가도 이내 전혀 그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식을 성공적으로 키워냈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소위 SKY 대학을 보내고 '사'자로 끝나는 전문직업인으로 키워내는 것만이 그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린 너무 쉽게 그 길만을 바라보있진 않는가.


부모가 우르르 달려가 보태지 않더라도 대한민국 중등 교육 시스템은 충분히 입시 위주이고 아이들은 성적 결과로 이미 충분히 재단되고 있다. 이 혹독한 5~6년을 견딘 아이들만이 진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볼 시작점에 '겨우' 이른다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내 아이는 이 기간을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뿌리가 단단한 아이인가? 그에 앞서 아이가 넘어지고 일어서는 과정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줄 정도로 우리는 충분히 단단한 부모인가?


대나무는 평생 한 번 꽃을 피우며 꽃이 피면 곧 죽는다고 한다. 그러니 대나무는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닌 ''인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대나무는 거대한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것일까? 광합성을 통해 자신의 몸을 키우는 나무와 달리 대나무는 광합성을 하고 난 영양소를 나무뿌리에 저장하여 새 순을 돋우고 생장시키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한 대나무의 뿌리는 11m까지 뻗어나가 우후죽순 새순을 틔우며 마침내 비바람에도 꿋꿋이 버티는 거대한 대나무 군락으로 생장하는 것이다.  


대나무는 죽순의 더딘 성장을 탓하지 않지요. (사진 출처: pixabay)


부모는 대나무와 같다. 아이에게 생의 양분을 뿌리부터 튼튼히 넣어주며 싹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아이 스스로 새순을 돋우고 단단한 나무로 성장할 수 있을 때까지. 죽순의 생장처럼 처음엔 더디기만 하던 아이가 튼튼한 뿌리 덕분에 어느 순간 하루에 30cm 이상씩 스스로 생장점을 끌어올리며 쑥쑥 성장할 대나무라 믿으며.

  

우리는 아이가 어렸을 때 '엄마 몰래', '아빠 몰래' 아이의 마음만 얻어도 행복한 엄마, 아빠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이제 아이는 혼자 힘으로 열심히 성장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엎어지고 뒤집어지는 아이의 성장 속 격변은 더디고 불안해 보인다. 그래도 모든 자연의 이치가 그렇듯, 튼튼한 뿌리에서는 건강한 싹이 트고 제 몫으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죽순이 잘 자랄지 미리 걱정하지 말고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양질의 영양을 공급할 일이다.


튼튼한 뿌리를 가진 대나무는 더딘 죽순의 성장을 탓하지 않는다. 내 아이의 발현 과정을 가장 오래도록 믿고 기다려 줄줄 아는 부모가 아이 마음을 얻을 최종 승자다. 





매거진의 이전글 체험신청서에 담긴 지지 문구, 눈물 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