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새 두 곳으로부터 부고를 받았다. 하나는 내 지인이고 다른 하나는 남편의 친인척 쪽이었다.
내 지인은 70대신데 올해 100세이신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남편의 친인척은 50대 사촌 형이시다. 100세 시대에 한 분은 백수를 누리시고, 다른 한 분은 그 절반 정도밖에 못 사셨다. 정말 나는 덴 순서가 있어도 가는 덴 순서가 없구나.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마음에 두 곳에 부의금을 보내며 두 분 모두 걱정 없는 곳에서 영면하시길 빌었다.
백수를 누리시다 여러 자식들과 손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신 분은 호상일 테니 떠나보내는 가족들의 마음이 그나마 좀 더 낫지 않으실까 싶다. 그러나 별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가장을 잃은 남편사촌형가족들의 슬픔과 허망함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세상 일엔 모두 인과가 있다지만 물음표만 있는 원인의 시간만을 살다 가신 건 아닌지, 조금이라도 삶의 결괏값을 보긴 하셨을지, 안타깝기만 하다.
여기저기서 100세 시대라고 하니 영원의 시간을 살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건 아닌가,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다. '네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면 어떨 것 같냐'고, '마음 편히 눈 감을 수 있겠냐'는 질문들이 마음속에 일었다. 지난했던 시간을 헤쳐 오면서 이제 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의 시작점에 온 것 같은데, 지금 이생의 모든 인연의 끈을 놓으라 한다면 너무 아쉬울 듯하다. 물음표가 가득했던 삶을 또 다른 물음표로 마쳐야 한다면 몹시 억울할 것도 같고. 그렇다고 저승사자가 내 이름이 적힌 명부를 들이밀고갈 길을 재촉한다면유한한 생명을 가진 한낱인간이 어찌할 도리가 있을까.
한편으론 그래도 손 놓고 맥없이 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오기가 솟는다. 죽고 사는 문제는 인간이 관장할 수 있는 영역밖의 일이지만 그런 순간이 왔을 때미련 없이 갈지, 후회로 점철되어 갈지의 선택은 인간의 영역이지 않을까. 결국 생각의 끝은 후회 없이 생을 마감하려면 내가 처한 현실인'지금', '여기'를 잘 살아내는 것뿐이라는데 안착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를 잘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 걸까? 두 가지 조건이 주어진다면 세상에 못 해낼 일이 없다고 한다. 그 두 가지 조건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마감 기한'과 '돈'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렇게 돈을 좇아대는 것인가. 그러나 돈만 좇다가는 생의 마감 기한과 급작스럽게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놓치고 사는 건 아닌지.
이렇게 된 마당에, 내 삶의 마감 기한이 내일이라고 생각해 보자. 정작 자기 자신도 못 다스리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불평불만을 쏟아내다 오늘을 보내고 말 것인가? 따스한 햇살을 듬뿍 받고 만개한 꽃과 싱그러운 싹을 틔우며 새 생명을 돋우는 나무들이 가득한 자연을 밖에 두고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려도 딱히 마음 둘 데 없는 TV와 대체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말 온라인 세상만 들여다보다 오늘을 마감할 것인가?
내일이 내 삶의 마지막 날임을 안다면 오늘을, 이 시간을 이렇게 허투루 보낼 수는 없을 일이다.
오늘 웃을 일이 없었나요? 그렇다면 녹록지 않은 하루를 잘 버틴 자신에게 응원의 미소를 지어 주세요. (사진 출처: pixabay)
내일 당장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남은 이들이 내 마지막 얼굴을 어떤 표정으로 기억하게 하고 싶을까. 난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지나치게 안타까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그저 소소하게라도 매일을 행복하게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그래서 오늘을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더욱 내 삶의 '긍정적인 중독'에 빠져 살다 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글라써는 그의 저서, <긍정적 중독>에서 긍정적 중독에 해당하는 기준을 다음 여섯 가지로 제시했다고 한다.
1) 자발적으로 매일 1시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동시에 경쟁적이지 않은 일
2)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으며 숙달되기 위해 정신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일
3)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여럿이 같이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일
4) 행할 만한 신체적, 정신적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일
5) 자기 자신만이 그 일의 성과를 판단할 수 있는 일
6) 스스로 비판하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일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일,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떤 이는 독서나 글쓰기, 예술 작품 제작 등의 창작 활동을, 또 어떤 이는 걷기나 달리기 등의 신체 활동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내겐 산에 오르는 일이 이 조건에 부합한다. 매일산에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일요일에 북한산 의상봉에 오르면 매일 걷기나 필라테스 등의 운동이 이 하루를 위한 워밍업이었구나, 싶어 지기 때문이다. 혼행은 나를 들여다보는충만한 시간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산행은 또 그 나름대로의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돌산을 네 발로 기어오르며 땀범벅이 되어 쏟아지는 바람과 햇살을 온몸에 받고 있노라면 한낱 미물에 불과한 내 몸이 자연의 하나가 된 듯한 고양감에 매번 부르르 떨리는 게 몸인지 마음인지모른다.
내일이 내 삶의 마감 기한이라면 오늘 자신이 조금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오늘의 운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고 선택은 오롯이 인간의 영역이니까. 오늘이라는 점 하나를 또 한 번 잘 찍어내다 보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생의 마침표도웃으며 찍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조금은 합리적인 생각에 기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