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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다운 산출물이 나온다

by 정혜영


브런치출판프로젝트 수상으로 탄생한 내 책, <어린이의 문장> 속 첫 챕터에 '누구나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당시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곳은 우리 집에서 가장 구석에 위치한 작은 부부 침실 내 더 작은 화장대였다. 비록 좁디좁은 공간이었지만, 그곳에서라면 온 가족에게 뻗치는 '아내''엄마'라는 역할 레이다를 잠시나마 끌 수 있었다. 그게 오롯이 나를 지키는 평화의 시간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엄마의 레이다가 꺼지는 시간은 온 가족의 평화의 시간이었는다는 웃픈 진실. 엄마와 아내의 애정 어린 가족 돌봄이 때로는 잔소리와 간섭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못내 서운하지만, 그때가 진정 거리두기 할 시점임을 하루라도 빨리 자각해야 한다.


최근에 딸이 지방으로 거처를 옮기며 우리 가족의 공간도 일대 변화를 맞았다. 이사할 때를 제외하곤 집 안의 가구 배치를 달리 한 적이 없던 게으른 남편과 나는 서로의 공간을 분리하기로 합심했다.


몇 년 전, 남편이 한창 목공에 빠져 있던 때, 작은 책상을 짜 달라고 주문했었다. 너무 큰 책상은 공간 낭비인 듯하고 내 작은 몸에 딱 맞춤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나와는 동상이몽인 남편은 자기 취향의 길고 커다란 책상을 짜 주었다. 내 의도와는 달랐지만 덕분에 미처 기대치 못했던 호사를 누리게 되나 보다, 싶었다. 내 안일한 예상은 자주 남편의 커다란 기획(?) 앞에 헛웃음 치는 결말을 맺곤 했지만 이번엔 다르려나, 싶었다.


사람 안 변한다. 목공 이후 남편은 취미 생활로 가죽 공예에 빠졌고 뭔가를 시작할 때 최우선 과제가 장비빨 예열이던 남편은 온갖 잡다한 가죽 공예 장비들을 사들였다. 커다란 책상이 그것들로 점차 채워지더니 마침내 2/3를 차지하는 걸 보며, 그럼 그렇지...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 차지는 처음 내가 원했던 딱 그만큼의 크기, 책상의 1/3이었다. 그 공간마저 가끔 침범하는 남편의 장비들을 필사적으로 응징하며 노여움으로 대응했다.


그런데 그 모든 인내심마저 임계점에 다다르게 되었으니... 최근 남편이 예전에 손대다 올스톱 했던 가죽 공예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자꾸 거실 테이블을 자신의 작업실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집 안의 가장 중심, 모든 가족의 평화의 공간이 되어야 할 공간이 가위와 끌, 망치, 바늘 등의 위험한 도구들로 장식(?)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제자리에 배치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공부방과 분리하겠다는 야심 찬 목적으로 컴퓨터 방을 따로 만들어 주었었다. 적어도 컴퓨터 방을 이용할 때 부모의 눈치를 보는 거름망의 역할을 해 주길 바랐는데, 코로나 시기에 가정에서 컴퓨터로 이루어지는 온라인 학습 기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기준과 경계가 모호해져 버렸다는 슬픈 진실.


무튼, 그렇게 아이들의 컴퓨터를 각자의 방으로 배치하며 비운 그 방을 남편의 작업실로 조성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에 그려왔던 그림이었으나 몸을 움직여줄 당사자가 꿈쩍도 하지 않아서 이루지 못했던 꿈, 내 공간에서 남편의 뾰족하고 요망한 물건들(질긴 가죽을 자르고 째고 찔러 바느질하는 데 사용하는 물건이 보드라울 리가 없다)을 몰아내는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처음엔 자기 공간이 구석방으로 배치되면 서로 얼굴도 자주 못 보는 거 아니냐는 허튼소리로 소심하게 반항하던 남편도 정작 자기만의 공간이 생기자, 점차 그곳을 자신에게 최적화된 장소로 탈바꿈시켜 갔다.


이곳은 아마추어 가죽 공예가, 'SUMNARU(남편 작품 서명)'의 공간입니다. 멋진 거 많이 만들어 주세요~^^ by 정혜영
남편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만든 내 장지갑과 카드 지갑들. 주변에 안 보여준다고 삐쳐 계신 인정 욕구 갈급한 50대를 위해 여기에 선보입니다.^^(made by SUMNARU)


아들이 초등학생 때 들였던 책상이 좁아서 컴퓨터까지 올릴 공간이 없자, 남편은 목재를 주문해 아들의 책상을 직접 맞춰 주겠다고 했다. 갑자기 몇 년 전,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딸 책상을 만들어주겠다며 집 안에서 모든 작업을 진행하던 그 지난했던 과정들이 떠올랐다. 이번엔 절대로, 가족들의 허파에 톱밥이 흡입되고 목재를 절단하던 전기톱의 괴성에 고막이 떨어져 나가는 걸 마냥 두고 보지 않겠다는 내 강한 저항에 남편도 조금 주춤했다. 결국 최소한의 작업으로 완성할 수 있도록 거의 완성형 재료를 주문해 아이의 책상이 만들어졌다.


아들 방에 있던 아들의 책상은 이제 남편의 작업 방 한쪽에서 공구 배치용 가구로 용도가 바뀌었다. 한동안 아들의 손때 묻은 물건이 아빠의 방에서 다른 역할을 하는 건, 왠지 찡한 일이다. 위로부터 흐르던 물이 잠시 방향을 역전해도 흐름상 아무 거침이 없으며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길을 틀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묘한 위안이다. 이제는 구태여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다며 나를 다그치지 않아도 되겠구나.


요즘 남편은 가끔 핸드폰을 집안 어딘가에 두고 다닌다. 핸드폰이 내장된 칩이라도 되는 양 한 몸이더니 관심 쏟을 공간과 일이 생기니 핸드폰 보는 시간이 부쩍 줄었다. 집중해 뭔가를 만들 때 남편의 핸드폰은 몇 시간 방치될 때도 있다. 남편에게 가장 사랑받던 핸드폰 양은 요즘 많이 삐쳤겠다. 그동안 소중한 남편의 시간을 뺏어왔던 중죄 자니 그 정도 처벌은 달게 받아 마땅하다.


오늘도 쓸쓸히 식탁 위에 남겨진 남편의 외로운 핸드폰양 by 정혜영


홀로 새 목표를 세워 정진하는 딸, 처음으로 자신만의 작업 공간을 갖게 된 남편, 이제 오롯이 내 공간을 되찾은 나. 각자 새로운 공간에서 각자의 꿈을 키워가는 우리 가족들, 모두 파이팅이다.


<어린이의 문장>에도 썼지만, 다른 사람이 명명해 준 역할을 잠시 접고 오롯이 '나'로 있을 수 있는 공간, 우린 누구나 그런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각자의 공간에서 타인들과의 끝없는 비교를 멈추고 오롯이 자신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드디어 되찾은 내 공간. 멋진 공간에 어울리게 열심히 읽고 쓰고 연주하겠습니다.^^ by 정혜영
내 공간에서 쓴 캘리그라피(캘리 by 정혜영, 문구 출처: 박노해 시인, 필사 회원인 지혜로운 숲님과 담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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