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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내 나이 때의 친정 엄마를 만나다

by 정혜영


가족 단톡방에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막냇동생이 폰앨범에서 찾았다며 올린 21년 전, 2004년에 찍은 친정 엄마 사진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3살 더 많을 때인데도 사진 속 울 엄마, 참 곱다. 녹록지 않았던 삶을 살아내신 분인데도 어찌 그리 고우셨는지... 조금만 삶이 덜 고단했더라면 얼마나 더 빛나셨을까.


오래전 엄마가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계셨다. 환한 웃음 뒤에 숨겨진 곡진한 눈물의 세월은 사진 속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늘 밝게 웃는 인물 사진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구현해내고 싶어 마음이 꿈틀대는 걸까. 창작 방식의 배움이 적은 이가 다룰 수 있는 도구는 많지 않으므로 그럴 때마다 난 쉬이 취사 가능한 연필과 색연필을 잡는다.


연필로 선을 계속 중첩해 천천히 그 사람을 그려가다 보면 미소 뒤에 가리어진 그 사람의 스토리까지 그려질 것만 같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포착했지만 대개는 고단했을 삶. 고달픈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다 카메라 앞에서 잠시 환해지는 그 한순간이 아름답기도, 애달프기도 하다.


타인의 웃는 사진을 봐도 그러한데 삶의 역사를 함께 건너온 친정 엄마의 활짝 웃는 사진을 그냥 넘길 순 없었다. 그런데 너무 의욕이 앞섰나. 오랜만에 연필로 스케치를 해서인지 자꾸 선이 엄마의 실제 모습과는 닮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우고 다시 그리고 또 지우고 다시 그리고... 몇 번 반복하다 알았다. 이건 실력의 문제라기보다 마음의 문제라는 걸. 머릿속에 엄마가 살아온 세월을 슬라이드 넘기며 그리다 보니 선이 너무 무거워졌다. 타인의 삶은 잘 몰라서 비교적 가볍게 그릴 수 있었는데, 친정 엄마는 그게 잘 안 되었다.


마음을 가볍게 덜어내는 데 딴청만 한 게 있을까. 친구들 메시지도 읽고 커피도 마시고 아직 기한이 조금 남은 손톱도 깎았다. 손톱깎이로 무거워진 마음의 모서리까지 또각또각.

그렇게 좀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책상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연필로 전체적인 윤곽을 그린 후, 지우개로 깔끔하게 지우고 남은 자국을 따라 펜으로 따라 그렸다. 만능인 다이소 색연필로 색을 입히고 명암을 조금 넣고 나니 비로소 엄마 얼굴과 약간은 비슷해진 것 같았다.


그림 배움이 적은 자가 그릴 때 마주하는 난관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웃는 표정을 그릴 때 가장 어려운 건 입이다. 웃는 각도가 약간만 달라도 전체적인 느낌이 원본과 다르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럴 땐 늘 그림을 제대로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한편, 그랬더라면 색연필로 그리고 있겠나, 싶기도 하고. 초보자가 흉내라도 내어 볼 수 있는 색칠 도구인 연필과 색연필이 이럴 땐 참 고맙다. 채색이 끝난 후, 그림 밑에 '2004년의 000 여사'라고 엄마 이름을 써넣었다.


21년 전의 친정 엄마를 그리다. (색연필 그림 by 정혜영)


그림의 당사자에게 그림을 보여줄 때 늘 걱정이 앞선다. 나름 열심히 그렸지만 당사자의 마음까지 만족시킬 정도의 실력은 아님을 알기에 늘 그림을 건넬 때 떨린다. 그래도 엄마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고 어린 딸의 마음이 된다.

친정 식구들 단톡방에 그림을 올렸더니, 엄마는 생각보다 놀라시며 무척 좋아하셨다. 그림의 당사자가 맘에 들어할 때 내 마음에도 비로소 온기가 돈다.


한 해, 한 해 몸과 마음의 변화가 다르다고 느꼈었는데 난 여전히 엄마의 20여 년 전에도 이르지 못했다. 엄마는 다시 그림 속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실까? 무엇을 버리고 싶으실까?


2~3년만 지나면 진짜 그림 속 엄마 나이가 된다. 그때에도 엄마처럼 고울지 자신이 없다. 사진 속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더 고운 걸 어쩌랴. 하지만 20여 년 후의 엄마 나이가 되어 돌아보았을 때, 지금의 내가 얼마나 곱게 여겨질지는 예상이 된다. 항상 "니들은 아직 젊으니..."를 입에 달고 사시는 엄마에겐 늘 딸의 50대도, 60대도 '젊은' 때일 것이다.

그러니 가장 젊은 오늘을 가장 빛나게 살아내야겠다. 내게 주어진 오늘은 '선물'이라는 사실, 잊지 말아야겠다. 오늘을 잘 버티고 살아낸 힘이 만든 내일은 좀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력이 될 테니까.



나태주님의 시, <선물> 중에서(캘리 by 정혜영, 배경 사진 by 그릿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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