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놓았다
시. 정혜영
물기라곤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폭염이 지나갔다
반가울 줄 알았던 비는
꽃비가 아니었다
하늘이 갈라진 듯
쏟아졌다
사람들은 젖지 않으려
몸을 접었다
안으로, 더 안으로
그 비를
온몸으로 맞는 건
너 하나
그런데 왜,
흙이 아닌
시멘트 위인 게냐
그곳은 숨 쉴 수 없는 곳
땅을 딛지 못하는
겁 많은 인간들의 세계
조심스레 너를 들어
네가 살아야 하는
그 땅으로 돌려놓는다
네가 가만히
몸으로 일군
비옥한 곳
네가 있어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곳
새벽부터 내내 장대비가 쏟아졌다. 평소처럼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셔틀버스 정차장에 갔다간 아침부터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될 게 뻔했다. 서툰 모정에 아들을 셔틀 정차장까지 태워다 주려고 나선 길, 빌라 현관문 안 쪽 서늘한 시멘트 바닥에서 미동도 없는 기다란 생명체를 발견했다. 꺅! 소리를 지를 뻔했다.
흙도 풀도 없이, 차갑고 딱딱한 인공의 바닥 위에 땅을 일구는 생명이 누워 있다는 것. 그것은 이상한 풍경이었다. 그곳은 생명을 위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꽃과 나무가 심어진 화단과 연결된 곳이라 비에 떠밀려 온 것일까.
서둘러 아이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현관에서 그것과 만났다. 아직 본격적인 출근, 등교가 시작되기 전이라 그대로 보존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것이 자력으로 났던 곳으로 돌아가기엔 난망한 일. 이미 출근 시간은 20분 지체되었다. 저대로는 봉변을 면치 못할 텐데. 어찌해야 할까.
현관문 한쪽에 대형 쓰레기받이 모양의 도구가 있었다. 그것으로 지렁이 앞쪽을(환대가 있는 쪽) 살짝 건드렸다. 그것이 거세게 요동치며 뒤집어졌다. 이번엔 제대로 꺅! 냅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 그대로 두면 안 된다는 마음이 치열하게 쌈박질했다. 다시 쓰레받기 평평한 쪽을 지렁이에게 조심스레 가까이 대었다. 그것은 다가온 것의 정체를 살피는 듯 더듬거렸다. 안 쪽으로 올라오면 얼른 화단으로 던져야지, 생각했는데... 이런 조심성 많은 지렁이가 있나. 쓰레받기 경계선만 더듬거리고는 당최 올라설 기미가 없었다.
시간은 가고 그렇다고 집어 올릴 수는 없고... 그러다 아파트 알림판 클립에 끼어 있는 종이 안내장들을 발견했다. 한 장을 빼내 지렁이 아래쪽으로 살살 밀어 넣었다. 다행히 종이는 부드럽게 밀려 들어가 종이 위에 온전히 놓였다. 종이를 들어 올리다가 무게중심이 쏠려 그것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쓰레기받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고. 거기에 종이를 당겨 올렸더니 지렁이와 종이가 무사히 안착되었다. 종이 한쪽을 들어 올려 화단에 지렁이를 쏠려 보냈다.
비가 스며들고, 그 비를 받아들이는 곳. 네가 나고 자란 곳, 위험하지 않고 외롭지 않은 곳. 네 몸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진짜 세계로.
우린 가끔 우리가 만든 세계가 지상최대의 낙원이라고 믿는다. 집과 도로, 시멘트와 유리와 빛.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위에서 인간 외의 다른 생명은 혼자 살아갈 힘을 잃는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땅을 일구고, 생명을 순환시키는 존재들이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 그들이 사라진 자리는, 언젠가 인간도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곳이 된다는 것을.
네가 흙으로 돌아간 순간, 작은 생명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그 순간, 우리 또한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조금은 되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